나의 소설/독서감상문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

유리벙커 2017. 7. 18. 01:39



이은봉, 책만드는집, 2017

 

 

시인 이은봉 선생님께서 시집이 아닌 시조집을 내셨다고 한다.

뜬금없이 웬 시조집일까. 그동안 시조도 쓰셨다는 말인데 언제부터 무슨 계기로 쓰셨다는 걸까.

시조, 하면 옛것부터 생각나고 고루하다는 선입견이 작동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은봉 시인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때는 시조를 늙고 낡은 언어예술 형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중략) 조선시대의 사대부적 가치를 반영하는 언어예술이니만큼 그들의 가치가 해체되고 소멸된 지금은 시조도 해체되고 소멸되어야 마땅하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1980년대를 거치면서 나는 그러한 생각을 수정한다. (중략) 오늘의 깨어 있는 시민계급과 과거의 깨어 있는 사대부 계급은 정서적으로 유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중략) 이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비판의식의 면에서는 물론 책임의식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략) 깨어 있는 주체로서 언어예술에 대한 깊은 의지를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그 사회의 특별한 몇 명 개인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시조는 오늘의 깨어 있는 시민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역할을 갖는다.”

이은봉 시인이 시조의 창작계급인 사대부의 의식과 시민계급의 의식을 연계한 점은 신선하고 새롭다. 그러나 시조가 갖는 형식(정형시)은 여전히 자유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예술의 본질은 저항의식이며 저항의식은 곧 자유를 의미한다. 이로 볼 때 시조는 그 한계를 넘기 어려워 보인다. 이은봉 시인도 그 점은 인정한다. “물론 주어진 형식 안에서 실현하는 변화와 변주는 어느 면에서 어눌하고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안에서 새로운 행의 처리로 새로운 리듬을 이루려는 탐구를 거듭 즐기고 있다. 을 단위로 행을 나누는 것이 기본 형식이지만 매번 그렇게 행을 나누는 것은 읽는 맛과 보는 맛을 고루하게 만든다. (중략) 주어진 틀 안에서의 자유, 곧 틀 안에서의 이런저런 자잘한 실험은 시민적 가치의 실천, 곧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실천에 대응하기도 한다. (중략) 시조의 기본 형식을 새롭게 발견하고 변주하는 일은 오늘의 삶이 지니고 있는 기본 형식을 발견하고 변주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은봉 시인의 시조는 정형화된 시조의 형식을 변주한 시조라는 얘기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이은봉 시인의 시조를 봐야 알 수 있겠다. 그렇다 해도 나로선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고등학교 때인지 모를 시기에 접하곤 그만인 시조를, 그런데다 변주까지 했다니, 무슨 재주로 알아낼 수 있을까. 이 말은 틀렸다. 난감함 때문에 한 말이지 예술은 알아내기가 아니라 느끼기.

먼저, 표제작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을 보자.

 

무등산 자락 여기저기

분청사기 파편들.

 

깨어지고 부서져

조각난 세월들.

 

미어져 터져버린 가슴, 너무도 많구나.

 

가마터 주변마다 버려져 있는 목숨들,

 

땅속에 묻힌 지

수백 년이 지났어도

 

저처럼 되살아나서 내일을 꿈꾸다니!

 

꿈이야 뭇 생명들의 본마음 아니던가.

 

버려진 꿈 긁어모아

이곳에 쌓고 보니

 

무등산 골짜기마다

동백으로 피는 봄볕.

 

 

이 시조에서 탁 다가오는 느낌은 허무다. 인간의 무상함이다. 그러나 되살아나서 내일을 꿈꾼다고, 그 꿈을 긁어모아” “쌓고 보니” “동백으로 피는 봄볕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 흙을 빚어, 모양을 만들고, 문양을 입히고, 유약을 발라, 불에 구우며, 그 순간마다 마음을 졸이며 정성을 다했을 영혼은 허무로 그칠 수 없다. 비록 분청사기는 파편이 되었지만 그 과정마저 파편화될 수는 없다. 허무가 봄볕으로 전환되어야 할 마땅한 이유다. 인간사가 그렇다. 최선을 다하지만 어디 최선을 다한 값을 주던가. 사는 게 그러하지만 우리는 수없이 분청사기를 만든다. 만드는 과정이 지난하고 때론 허무하지만 그칠 수 없다. 무엇엔가 밟혀 파편이 된다 해도 우리는 흙을 빚고 문양을 새기며 뜨거운 불에 굽는다. 분청사기는 곧 나 자신이다. 포기할 수 없는 나 자신.

 

 

<바퀴벌레>라는 시조는 참 재미있다.

 

우르르 싱크대 밑, 몰려다니는 저 신사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살아왔다며

 

검정색 정장 입고서는 으쓱대는 꼴이라니!

 

그렇게 살아왔으면 세상일 죄 환하겠거늘, 어찌해 불빛만 비치면 정신없이 도망치나.

 

일단은 그렇게라도 살고 봐야 안 되겠나.

 

아제는 불 다 꺼졌으니 어서 빨리 나오게나. 멋대로 신나게 주둥이 좀 까세그려.

 

책상 밑 숨지만 말고, 쌀독 뒤 숨지만 말고!

 

말은 그럴듯해도 네 모습 재밌고나. 나도 별 것 아니지만 너도 별것 아닐세.

 

주둥이 달싹대는 꼴, 철없는 시인이고나.

 

 

척 봐서 알겠지만, 이 시조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희화화한 것이다.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자 자신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몸이 아닌, 말로는 뭘 못할까 하는 비판인데, 거기엔 정치인도 있지만 시인도 있다는 반성이다. 다시 말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달라는 요구다. 이성이 아닌 몸이, 즉 행동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마르크스와 니체가 절로 떠오른다.

 

읽는 내내,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시조에도 이런 가벼운 스텝이 있었나 싶다. 저 먼 고려시대의 정형을, 2017년의 다양성으로 조리해 컴백시킨 맛이 근사하다. 시조의 매력을 알아버린 이은봉 시인에게 또 한 권의 시조집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