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방미경 옮김, 민음사
이 작품은 쿤데라가 14년 동안 절필했다 2014년에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그의 나이 85세에 출간했다는 얘기이다. 그런 만큼 비평가들, 독자들의 관심이 사뭇 달랐으리라는 점은 짐작해볼 수 있다.
흔히 독자들은 유명세를 탄 작가들에 선입견을 갖는다. 비평가들의 평도 평이지만, 이전 작품이 좋았으므로 그 다음 작품도 좋으리라는 일종의 예언적 편견이 자리한다. 그러나 유명한 작가들이라도 매번 좋은 작품을 쓸 수는 없다. 쿤데라의 이 작품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맨 먼저 이 소설에서 부딪친 장벽은 형식이다. 장편이 주는 연결성이 거의 없는, 단편적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장편을 쓸 줄 모르는 습작자들처럼, 독자적 챕터의 구성으로 나열되어 있다. 하나의 퍼즐이 전후 맥락을 무시한 채 또 하나의 퍼즐로, 그 퍼즐은 다른 퍼즐로 나타날 따름이다. 장편이 주는 내러티브를 마다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을 말하고자 이런 형식을 취했을까. 말할 수 없는 것을 이런 형식으로 말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소설을 이해하자면 그 시대나 작가의 생을 알아야 하는 건 상식이다.
우선 내용으로 들어가 본다. 독립적인 챕터를 이리저리 이어보면 이렇다.
배경은 프랑스 파리. 알랭이 거리에서 배꼽티를 입은 여자들을 본다. 알랭은 여자의 긴 다리, 엉덩이, 가슴의 섹슈얼리티와 배꼽의 에로티시즘을 비교한다.
같은 시간, 라몽은 샤갈 전을 보러 가지만 대기 줄이 길자 공원으로 간다. 그곳에서 옛 직장동료인 다르델로와 우연히 마주친다. 다르델로는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 한다. 다르델로는 자신도 모르게 나온 거짓말에 기쁨을 느낀다.
한 시간 후, 라몽은 샤를 집에 와 다르델로가 초대한 칵테일파티에 가자고 한다. 이어, 카클리크라는 친구 얘기를 꺼낸다. 카클리크는 끊임없이 중얼거리지만 주의를 끌지 못하는 캐릭터다. 그런데도 바람둥이다. “말을 하면서 주의를 끌지 않는다는 건 쉬운 게 아니야.(중략) 침묵은 주의를 끌지.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어. 수수께끼같이 알 수 없게 만들어줘.”24쪽. 라몽은 다르델로에 관한 이야기도 한다. 다르델로는 말을 잘 해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다. 라몽은 “보잘 것 없는 것의 가치를 그 사람(다르델로)은 전혀 몰랐고”25쪽. 라며 말을 잇는다. “뛰어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할 때면 그 여자는 경쟁 관계에 들어갔다고 느끼게 돼. 자기도 뛰어나야만 할 것 같거든. 버티지 않고 바로 자기를 내주면 안 될 것 같은 거지. 그런데 그냥 보잘것없다는 건 여자를 자유롭게 해 줘”25쪽.
그 다음 이야기는 뜬금없이 스탈린이 등장한다. 스탈린은 부하들을 앉혀 놓고 자신이 죽였다는 자고새 24마리에 관해 늘어놓는다. 스탈린은 칼리닌이라는 전립선 비대증 부하의 이름을 따, ‘칼리닌그라드’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이유에 대해 알랭은 “역사의 짧은 순간 동안 스탈린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원수고, 자신도 그걸 알아. 그는 모든 대통령과 제왕들 가운데 자기 혼자, 파렴치하게 계산된 대단한 정치적 제스처들을 싹 무시해 버린 사람, 완전히 개인적이고 변덕스럽고 무분별하며 휘황찬란하게 기이하고 아주 근사하게 터무니없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데에 짓궂게 기쁨을 느끼는 거야.”43쪽. 라고 말한다. 다르델로가 암이 아니면서 암이라고 거짓말 한 후에 느끼는 버전의 확장이다.
알랭은 다시 배꼽에 대해 생각한다. 열 살 때, 알랭은 아버지와 이혼한 엄마를 만난다. 알랭이 휴가지 수영장에서 나왔을 때 엄마는 알랭의 배꼽을 “이해하기 힘든 시선, 그 시선에는 어딘가 설명할 수 없게 연민과 경멸이 한데 섞여 있는 것 같은” 48쪽. 시선으로 본다.
그 다음에는 그녀로 나오는 여자(나중엔 알랭의 엄마임을 알게 된다)가 강에 뛰어든다. 그녀는 자신을 구해주러 온 소년을 일부러 익사시킨다. 그녀가 강에 뛰어든 것은 뱃속에 있는 알랭이 사산되길 바라서다.
알랭은 여자 친구에게 “왜 틈만 나면 죄책감을 느끼는”57쪽. 지에 대해 말한다. “삶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자기 잘못이라고 고백하는 자는 패하리라.”57쪽.
이 부분은 쿤데라의 과거에 근거해 있다. 쿤데라가 체코에 살 당시 공산주의(전체주의)가 들어온다. 쿤데라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데 스탈린의 독재가 작용한다. 독재는 자율성을 말살하고,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먼 훗날(2008년쯤), 쿤데라는 간첩 사건에 연루된다. 어느 기자의 고발인데, 쿤데라가 20대 때 누군가를 고발했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이 죽었다는 기사다. 그 일로 쿤데라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사용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명예는 실추한다. 14년간의 절필 공백의 시작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도 기자의 말이 맞는지 쿤데라의 말이 맞는지 알지 못한다. 쿤데라가 “틈만 나면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대목을 보면 쿤데라의 간첩 사건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한편 샤를과 칼리방은 칵테일파티에 간다. 샤를은 개인 칵테일파티를 준비하는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처지이고, 칼리방은 연극배우로 지내다 생활이 곤란하여 파티에서 서빙하는 일을 한다. 그 둘은 다르델로의 집으로 가 파티 준비를 한다. 그때 칼리방은 포르투칼인인 가정부와 이야기를 하게 된다. 가정부는 프랑스어로 말하지만 칼리방은 못 알아듣는 척하며, 파키스탄어로 대꾸한다. 그러자 가정부 역시 “프랑스어, 자기가 싫어하는 언어를 내던지고 모국어를”69쪽. 쓴다. “알아듣지 못하는 두 언어로 나누는 대화가 그들을 서로 가까워지게 만들어 주었다.”69쪽. 알아듣지 못하는(무의미) 말이 알아듣게 되는(의미) 역설적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카클리크의 중얼거림(무의미)이 여자들에게 어필(의미)되는 경우와 같다.
알랭 역시 같이 산 아버지의 사진은 단 하나도 없는데, 자신을 버리고 간 어머니의 사진은 액자로 걸어둔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와 알 수 없게 된 인물(어머니)의 중심에는 부재가 작용한다. 부재에는 집착이 은연중 내재화 되어 있다. 신비감과 왜곡이 파생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파티의 한 장면에는 프랑크 부인이 나온다. 그녀는 얼마 전에 상처한 인물이다. 그녀는 파티에서 비극적인 표정을 지으며 연극적인 말과 제스처를 한다. 모인 사람들은 그런 그녀에게 대단한 관심을 표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카나페와 음식을 탐욕스레 먹는다. 이때 다르델로의 딸은 본 적도 없는 프랑크 부인을 아주 잘 아는 듯이 다가와 환호하며 위로한다. 그리고 다르델로는 프랑크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쓴다. 그러는 와중, 깃털 하나가 둥둥 떠다닌다. 프랑크 부인은 깃털을 잡으려 손가락을 펼치고, 사람들은 왠지 모를 불안에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때 스탈린이, 일어선 부하들에게 앉으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자 몰로토프가 스탈린에게 “사람들이 당신 동상들을 철거할 거랍니다”94쪽 라고 말한다. 이에 스탈린은 “이걸 몽상의 끝이라고 하지. 모든 꿈은 언젠가는 끝납니다. 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어요. 이 무지몽매한 자들, 그걸 모른단 말이오?” 라고 한다.
깃털의 무게와 동상의 무게는 동격이다. 허위성이라는 무게. 쿤데라는 거짓이 주는 가치, 거기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하는 부류들을 이런 식으로 냉소한다. 쿤데라의 냉소는 이어진다. “샤를하고 너는, 사교계 칵테일파티에서 불쌍하게 속물들 시중이나 드는 동안 좀 재미있게 해 보려고 웃기는 파키스탄 말을 만들어 냈어. 뭔가 신비하게 만드는 즐거움이 너희에게 보호막이 돼 주었을 거야. 하긴 그게 우리 모두의 작전이기도 했지.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96쪽. 그래서 쿤데라는 ‘거짓/거짓말’의 버전을 이용한 것이다.
조금 더 굵직한 거짓/거짓말의 버전엔 스탈린의 삽화가 단연 우세하다.
스탈린은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반대하면서 쇼펜하우어의 개념을 치켜세운다. “동지들, 세계는 표상과 의지일 뿐이라는 거요. 이 말은 즉, 우리가 보는 세계 뒤에는 어떠한 실체도 없다. Ding an sich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 표상을 존재하게 하려면, 그것이 실재가 되게 하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 말입니다.”116쪽. 이어 스탈린은 “커다란 의지의 지배 아래 놓이면 사람들은 결국 아무거나 다 믿게 되는 법이거든!”117쪽. 라고 말한다.
스탈린이 공포와 거짓을 이용해 민심을 선동했고, 그 선동에 인민들이 넘어간 것은 진실/실체가 아니라 깃털이 주었던 두려움(천사의 날개 같은 깃털, 천사가 땅에 떨어지면 죽는다는 속설)과도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역설적 발언이다.
알랭의 집에선 수납장 꼭대기에 올려둔 아르마냐크 브랜디를 칼리방이 꺼내려다 깨뜨린다. 이 술병이 여왕으로 보였다는 것과 스탈린 동상이 끌려 내려오는 것, 마지막에 스탈린의 부하인 전립선 비대증인 칼리닌이 공원의 동상에 오줌을 누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물자체를 부정하는 행위. 사람들은 물자체보다 물자체에서 나오는 이미지를 믿는다는 뜻이다.
한편 스탈린은 “근사한 제복을 벗고 오래 되어 낡은 파카를 입은 다음 긴 사냥총을 집는다.”127쪽. 이때 흐루쇼프는 “그다! 저런 복장을 하고 있는 거 다들 보이지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사냥꾼이라고 믿게 할 참이라고요! 우리만 이렇게 궁지에 몰아넣고! 죄인은 저 사람이에요! 우린 전부 희생자라고! 저 사람의 희생자!”127쪽. 라고 외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스탈린이 소련을 창설하고 사망하자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며 후계를 잇는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알랭이 술병을 수납장 위에 놓으며 여왕으로 보였던 반면, 칼리방은 그 술병을 꺼내려다 떨어져 술병이 박살난다. 우상은 박살나야 한다는 쿤데라의 생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라몽과 알랭은 샤갈 전을 보러 나온다. 첫 장면에서처럼 샤갈 전을 보려는 줄이 길다. 사갈은 환상을 그렸고, 사람들은 환상을 원한다. 라몽과 알랭은 샤갈 전을 포기하고 공원으로 간다. 스탈린이 낡은 파커를 입고(처음 공산당을 세울 때의 헌신적인 모습) 공원으로 와 공원에 있는 프랑스의 왕비 동상을 총으로 쏜다. 그때 동상 뒤에서 오줌을 누던 칼리닌이 오줌을 눈 후의 행복감을 드러내며 나온다. 쿤데라는 다르델로와 라몽과 알랭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147쪽.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그것은 지혜의 열쇠이고, 좋은 기분의 열쇠이며...”147쪽.
여러 인물이 나오고, 배꼽에 관한 삽화, 깃털 이야기, 스탈린의 삽화가 나오지만 쿤데라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연결성을 거부한 챕터의 구성 역시 무의미의 뜻이다.
이 작품은 호불호로 갈린다. 어느 비평가는 대단한 작품이라고 말하는 반면, 독일에선 그 예전의 고발 사건에 대한 변명 혹은 모욕에 대해 쓴, 대중소설에 불과하다고 혹평한다. 독자들은 많고 평가도 제각각이라는 점은, 소설이 지속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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