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지하철을 탔다.
내가 앉은 건너편 자리엔 동그란 안경을 쓴, 야무져 보이는 아가씨가 앉아 있다.
그 아가씨, 내가 앉은 쪽 옆옆 자리에 시선을 고정한다.
잠시 후, 그 아가씨가 일어나더니 내 옆옆 자리에 앉은 아저씨 같은 할아버지에게 다가간다.
“저... 거긴 임산부석인데요, 제 자리에 앉으시지요.”
두 손으로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권한다. 말투며 행동이 공손하다.
선글라스를 끼고 덩치도 큰 아저씨 같은 할아버지, 벌쭘하는 듯하더니 아가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다.
그것도 잠시. 얼결에 앉긴 앉았는데 그 사실이 무렴하고 괘씸했는지 아가씨를 향해 언성을 높인다.
“아니, 임산부석이 비어서 앉았는데 뭐가 어때? 임산부가 오면 일어나면 될 거 아냐!”
젊은 할아버지, 자리에서 일어나 아가씨 앞으로 가 삿대질을 한다.
아가씨, 할아버지를 똑바로 보며 말한다.
“임산부석은 임산부가 오든 않든 비어두어야 해요.”
젊은 할아버지의 삿대질.
“뭐가 어째? 빈자리라 앉았는데 뭐가 어때! 오면 일어나면 될 거 아냐!”
삿대질과 고성이 이어지고, 같은 말이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다.
아가씨, 말이 안 통한다 싶었는지 사무적으로 말한다.
“저한테 그러지 마시고 코레일에 말씀해 보세요. 그리고 저한테 손가락질 하지 마세요.”
젊은 할아버지,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계속 삿대질과 고성.
할아버지 연배로 보이는 또 다른 할아버지가 다가와 힘을 보탠다.
“젊은 것이 어른한테! 아,아, 괜찮습니다. 임산부석에 그냥 앉으세요.”
내 옆에 앉았던, 할아버지도 아닌 아저씨가 거든다.
“젊은 애가 어디서 어른한테 따박따박 말대꾸야? 아, 그냥 앉아계세요.”
지하철 안이 시장만큼이나 떠들썩해진다.
이때, 저쪽 어디쯤에서 임산부가 다가온다.
임산부, 조용히 교양 있게 말한다.
“제가 임산부예요. 저 같은 사람을 위해 이분이 그렇게 말씀하신 거 같은데 이해해주세요.”
임산부가 아가씨의 어깨를 감싸고 자기가 앉았던 자리로 이끈다.
젊은 할아버지, 아가씨가 양보한 자리를 마다하고 다른 빈자리로 가 앉는다. 그 자리 역시 임산부석. 할아버지, 임산부석에 앉아 계속 떠든다.
임산부를 따라 저쪽으로 갔던 아가씨, 서 있다 말고 빈자리를 발견하고 앉으러 온다.
할아버지에게 양보했던 바로 그 자리.
아가씨가 원래 자기 자리로 와 앉는 걸 보자, 임산부석에 앉았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아가씨 앞으로 간다. 이어지는 고성과 삿대질.
“나도 임산부가 오면 일어나는 거 알아! 나도 경로석에 앉을 나이지만 경로석에 안 앉았어! 오면 일어나면 될 거 아냐! 빈자리에 앉은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따위로!”
아가씨, 할아버지에게 밀리지 않는다.
“임산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할아버지, 벅벅 우긴다.
“임산부를 왜 몰라! 보면 알 수 있어!”
아가씨, 여기까지 말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겠다는 뜻이 들어있다.
“임신 초기엔 알 수 없어요.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이 들면 유산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자리를 비어두어야 해요.”
할아버지, 아가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아버지를 응원하는 연배의 남자들도 아가씨를 욕할 뿐 받아들이지 않는다.
....................
이 사건은 임산부석으로 시작했지만 임산부석을 빙자한 세대 간의 갈등이다.
어린 것들은 어른이 뭐라 하든 네네네 해야 한다는 악습 혹은 고집.
불행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유심히 보게 된 임산부석.
의외로 임산부석에 앉는 사람이 많다.
경로우대석은 텅 비어 있어도 임산부석이 비어 있는 건 보기 힘들다.
어떤 젊은이는 한 줄이 다 비어있어도 임산부석에 앉는다.
어떤 아줌마도 빈자리를 마다하고 임산부석에 앉는다.
그들의 공통점은 임산부석이 아니라 그저 빈자리(혹은 좋은 자리)에 본능적으로 앉는다는 점이다.
임산부석은 왜 그리 인기가 좋을까.
자리 배치도 하나의 원인이 된다고 본다.
임산부석은 출입문 바로 옆에 있다. 내리기 쉽고 앉기 쉬운 자리. 양옆에 사람이 앉아 불편하다면 불편한 그런 자리가 아니라, 한쪽에만 사람이 앉는 자리.
임산부석에 대한 대안은 별로 있어 보이지 않는다.
경로우대석처럼 임산부석 역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지만, 그 의식이라는 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나.
유교사상이 미래 세대(임산부)보다 더 막강한 걸 보면, 임산부석은 아직도 미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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