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700원의 무게

유리벙커 2018. 6. 20. 14:20

요즘 매일 하는 일이 있다.

저녁을 먹으면 아파트 단지 내를 걷는 것.

오늘도 저녁을 먹은 후 아파트 단지를 걷는다.

밤바람이 더워지는 몸을 사이다 바람으로 식힌다.

한 바퀴를 돌자 택배 탑차가 정차해 있는 게 보인다.

시동은 꺼져 있고, 조수석 문도 화물 적재함도 활짝 열려 있다.

조수석이며 화물 적재함에는 배달해야 할 상자가 켜켜이 쌓여 있다.

930.

이 시간까지 일을 마치지 못했나.

한 바퀴 두 바퀴를 돌도록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집어갈 사람이 없다고는 하나 배달품을 저리 놓아두어도 되나?

다시 한 바퀴를 돌아 택배 탑차 앞에 이른다.

나만큼이나 자그마한 여자가 화물 적재함에 기대어 서서 쌓인 상자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뒷모습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온다.

다시 한 바퀴를 도는데, 택배 기사가 캐리어를 끌고 지나간다.

땀 냄새와 열기가 후끈.

또 한 바퀴를 돌자, 놀이터 빈 벤치에 택배 기사와 나만큼이나 자그마한 여자가 앉아 있다.

LED 조명은 환하고, 그 조명등 아래서 택배 기사가 급히 뭔가를 먹는다.

국물이 든 음식.

택배 기사의 아내는 남편이 먹는 걸 지켜보기만 한다.

다시 한 바퀴를 돌자 택배 기사 부부는 보이지 않는다.

택배 차도 정차한 그대로.

부부는 또 어느 집에 배달을 간 모양이다.

10시가 넘은 시간.

한 상자를 배달하면 700원이 남는다고 했던가.

속이 아우성이다. 사는 게 뭐기에. 도대체! 사는 게 뭐기에.

누군가는 700원이 아니라 700억도 돈이 아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삶의 무게가 700원밖에 되지 않는다.

700원의 무게가 700억만큼이나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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