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금서로 여겨지던 『공산당선언』.
지금은 대중이 읽고 비판과 찬사를 보내는 정치적 기본 지식서.
대체 『공산당선언』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
늘 궁금해 하던 차, 마침 철학아카데미에서 『공산당선언』 강의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강사는 박정하 교수.
『공산당선언』을 읽기 전부터 들었던 의문 하나.
인간에겐 성취 욕구가 있고, 그에 따른 취득 욕망이 있는데, 공동으로 작업하고 공동으로 이익을 분배한다는 건, 인간의 욕망을 간과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공동의 노동을 통한 공동의 이익 분배는 결국 산업 발전을 약화시키고,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자급자족의 결과만 낳을 뿐이라고 여겼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공산당 이론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궁금증을 안고 『공산당선언』을 편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의 한중간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괴리에 충격을 받아 『공산당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공산당선언』이 발표되던 당시(1848년)엔 마르크스의 이론이 너무도 획기적이어서 유럽 각국에선 마르크스의 이론을 채택할지 말지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공산주의’라는 말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서문 첫 구절엔 이런 말이 나온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이 연합하여 이 유령을 잡기 위한 성스러운 몰이 사냥에 나섰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이.”
마르크스는 그 다음 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에서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라고 말한다. 기록된 역사는 그렇다는 것이고, 원시공동체는 제외시킨다는 뜻이다. 각주에 보면, “이 시원적 공동체의 해체와 더불어 사회는 특수한 계급들, 결국 서로 대립하는 계급들로 분열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현재 자본주의를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적용 가능한 말이다. 돈이 권력이 되고, 권력은 계급으로 차등화 된다.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그때, 마르크스는 이 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배권을 얻은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가부장제적인 그리고 목가적인 관계들을 모두 파괴했다. (중략) ‘현금 지불’ 외에 다른 어떤 끈도 남겨두지 않았다. (중략)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존엄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켰고, 문서로 확인되고 정당하게 획득된 수많은 자유들을 단 하나의 비양심적인 상업의 자유로 대체했다. (중략)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무미건조한 착취로 바꿔 놓았다.”
이 부르주아지는 점점 힘을 갖으면서, “자신들의 형상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으며 “농촌을 도시의 지배 아래 종속시켰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상업의 발전이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을 발생시켜 “사회는 갑자기 일순간의 야만 상태로 후퇴”되는 형국이라고 지적한다. 즉 부르주아지의 사회는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 수단, 너무 많은 산업, 너무 많은 상업”을 소유하는 바람에 파괴된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때 부르주아지가 만들어 낸 건 노동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을 통해 부르주아지는 부를 축적한다는 말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일자리를 찾는 한에서만 생존하며, 자신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시키는 한에서만 노동을 발견할 수 있”고 “자신을 한 조각씩 팔아야 하”며 “여느 판매품과 같은 상품이며” “경쟁의 모든 부침, 시장의 모든 변동에 내맡겨져 있”으며 “기계의 단순 부품이 되”어 “이 부품에 요구되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손동작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가진 계급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행동 외엔 없다고 단언한다. 서문의 마지막 말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외침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을 한마디로 대변한다. 마르크스는 이념에서 현실을 찾겠다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겠다는 주의다. 그러하기에 행동 없는 이론은 공허하다고 여긴다.
또한, “자본은 개인적인 권력이 아니라 사회적인 권력”이므로 “자본이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속하는 공동 재산으로 변한다고 해서 개인의 재산이 사회의 재산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재산의 사회적 성격이 변할 뿐이다. 그것은 계급적 성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말은 낭만에 가까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듯이 보인다. 가장 큰 자본은 인간의 노동력이고, 그 노동력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해 하나의 큰 단체의 힘으로 작동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사회적인 권력’이 된다. 그럼에도 내가 위의 말을 낭만적으로 보는 견해는, 개인의 노동력이 단체의 노동력이 된다고 해서 계급이 상실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개인은 자신의 노동력을 차등화 해 계급을 만들고, 그에 따른 차등적 보상을 바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단체화도 단일화도 될 수 없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공산당선언』 서문 뒤에 보면 행동을 촉구하는 발언이 나온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중략)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공산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이 있다. 러시아와 유럽,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 등. 하지만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유럽에서처럼 황제와 부르주아지, 농노의 계급을 거치지 않고 단숨에 혁명을 이룬다. 알다시피 피의 숙청, 차르의 전복.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민을 해방시키지는 못한다. 마르크스가 원한 공산주의 사회는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잘사는 사회, 즉 공정한 분배였지만, 일인 독재와 철권 정치로 점철된다. 앞에서 말한 ‘소유’ 개념이 들어간 것이다. 혁명을 일으킨 자들의 ‘소유 잔치’. 그럼에도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마르크스의 공정한 분배를 채택해 국회에 노동당이 들어선다. 여기서 공정한 분배란, 차등의 원칙을 말한다. 즉, 능력이 있는 자는 짧은 시간에 짧은 노동력으로 많은 목표를 달성할 것이고, 능력이 저조한 자는 긴 시간 노동을 해도 많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이때 마르크스는 많이 번 자는 세금을 더 내고, 적게 번 자는 세금을 덜 내는 것으로 공정한 분배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정한 분배야말로 마르크스의 핵심 사상이다. 마르크스가 브라케에게 편지로 보낸 <고타 강령 비판>에도 그 점을 명확히 한다.
헌데 전 세계는 이미 자본주의 사회를 굳건히 지향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했음에도(자본주의는 오래 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공룡이 되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마르크스 이론이 경제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한계성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욕망은 다 같이 일해 다 같이 누리는 행복이 아니라 ‘소유’에 있다. 나만의 것. 나의 것. 그런 욕망이 인간에게 있는 한, 유감스럽게도 공산주의는 다수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 욕망을 채워준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야말로 엄청난 계급 차별이 있음에도, 인간은 그 자리의 정점에 이르기를 원한다.
결론은 무엇일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포섭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 사상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일 터이다. 즉, 공정한 분배. 비록 자본주의와 공정한 분배가 조화를 이루기엔 매끄럽지 않지만, 우리는 상반된 두 개의 길이 상생을 도모하길 바란다.
『공산당선언』은 짧은 내용이지만 거대한 사상이 들어 있다.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이렇다 저렇다 거론하기엔 솔직히 버겁다. 그럼에도 나는 공정한 분배를 배운 것에 의미를 둔다.
책을 덮으며 드는 생각 하나.
만약 마르크스가 현대의 IT와 로봇 시대에 와 있다면, 그의 사상은 어떤 이론으로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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