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는 이상국 시인이 문학자전으로 쓴 책이다.
그간 7권으로 나온 시집에서 대표작이라 할 만한 시를 추려 책으로 낸 것이고,
시인이 살아온 내력과 사진들, 평론가들이 본 이상국 시의 평론과, 지인 작가들이 본 인간 이상국을 보여주고 있다.
시 전문가도 아닌 내가 이상국 시인의 시를 어떻다 말하긴 어불성설이지만 나름 독자로서 말한다면, 그의 시는 따뜻하고 토속적이다. 우리의 생활과 마음을 꼭 들어맞게 시로 풀어냈으며, 미화시키거나 오버하는 것 없이 솔직하다. 그렇다고 미적 영역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문학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슬픔이 가득하고, 슬픔이 가득하면서도 따뜻하다. 두 선상을 하나로 녹여 시적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이상국 시인만의 실력이 아닐까 한다.
그가 젊은 날 야반도주를 했다 다시 집으로 오는 길을 그리는 시는, 그의 젊은 날의 이력과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진부령>
내 스무 살
저 지랄 같은 새벽,
아버지 소 판 돈 몰래 들고
서울 가는 디젤버스 기름 냄새에
개처럼 헐떡이며 넘던 영.
그 큰 소 다 털어먹고
추석명절 달 그늘만 믿고 돌아오던 날
먼지 낀 차창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면목 없는 얼굴을 비춰보다가
고개말량 이르면
그만 눈물 나던 영.
또한 시인의 마음이 나/우리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도 있다.
<마음에게>
마음이여
쓸데없이 돌아다니다가
피곤하니까 돌아온 저를 데리고
나는 자전거처럼 가을에 기대섰다
구름을 보면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가면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여
때로 세상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내가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하면
늘 알아서 하라던 마음이여
저는 늘 내가 아니고 싶어 했으나
내가 아닌 적도 없었던 마음이여
그래도 아직 사용하지 않은 슬픔이 있고
저 산천에는 기다리는 눈비가 있는데
이까짓 지나가는 가을 하나에
저나 나나 속을 다 내보이지는 못하고
오늘 하루쯤 같이 지내면 어떠냐니까
그렇게 하자며
내 어깨에 제 몸을 기대는 마음이여
이 외에도 ‘내’가 된 시는 많다. 공감력이 크다는 의미다. 그만큼 이상국 시인의 시는 서민적이며 보편적이다. 우리의 속앓이를 어쩌면 그렇게 잘 짚어내는지, 그가 나고 내가 그가 된 듯한 느낌이다.
그가 쓴 <나를 기다려준 나에 대한 이야기> 편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우리 자신에게 도달하려면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라고 한다. 누군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기다리는 사람”-146쪽. 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감탄한다. 내 경우, 글을 쓰고 싶어 마음이 초조해지는데 글은 나오지 않고, 그래도 쓸 때면 영락없이 글이 아닌 글이 나온다. 기다림을 기다리지 못해서다. ‘나를 기다려주는 나’에게 나는 너무 성급했던 거다. 기다림이란 얼마나 고된 노동인가. 이상국 시인은 그 기다림이 얼마나 더디게 오는지, 그래서 소중한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의 말 중, “시인은 언제든 현실과 시대정신에 무관할 수 없고 그것이야말로 시인에게 부여된 영예이자 짐일 것이다”-158쪽. 와 “인간의 마음은 근원적으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 문학은 그걸 건드리는 일”-159쪽. 이라는 대목은 작가로선 당연히 알고 있을 법한 말이지만, 새삼 각인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또 지금의 나에게 던지는 듯한 말도 있다.
“여하튼 세상에 대하여 쓸데없이 잘 보이려고 애를 쓸 일도 없고, 경쟁 상대가 없는 시합처럼 굳이 이기고 지는 것을 따질 필요가 없는 데까지 당도했으니”-179쪽. 라는 말은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내게 각별히 다가온다.
이상국 시인이 밝힌 사생활은 어찌나 재미가 있는지, 읽다가 빵 터져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시인이 크게 마음을 먹고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을 때다. 배낭이나 스틱까지도 빌려 간 시인은 소청대피소에 머문다. 그때 60대 초반의 남자가 고기를 굽고 라면을 끓이고 팩소주를 마신다. 시인은 주먹밥과 참치 캔만 달랑 가지고 갔는데, 언제 내게 소주를 건네며 라면 국물이라도 마시라고 하지 않을까 기다린다. 그런데, 60대 남자는 결국 소주도 라면 국물도 남김없이 다 먹어치우곤, 후식으로 바나나와 에이스를 먹는다. 그때 시인은 화딱지도 나고 무안하기도 하다. “라면 국물의 모욕과 술 설움까지 당한 나는 부끄러울 게 없었다. 살다 살다 너같이 인색하고 치사하고 쪼잔한 인간은 처음이다. 스쳐 지나가면서도 인사를 하는 게 산행인데 면전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이 빈상의 노친네를 본체만체 지 배만 채우는 니가 인간이냐. 그래 너 잘났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나의 패악은 끝이 없었다.”181쪽.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도 시인처럼 같은 마음과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시인은 같은 상황을 참으로 맛깔스레 말한다.
또 하나 있다. 시인이 목욕탕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시인은 경로우대가 되는지 종업원에게 묻는다. 종업원은 만으로 생일이 안 지났으므로 경로우대가 안 된다고 한다. 시인은 무안하고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다른 목욕탕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돈 천 원에 삐쳐서 가는 것도 속 보이는 짓이다. 해서, 그는 멀쩡한 표정으로 목욕탕엘 들어간다. “그러고는 따뜻한 탕 깊숙이 잠수하듯 몸을 누이고 생각했다. 더러는 궁하거나 불편하더라도 나이를 팔아선 안 되겠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게 베풀어준 저 우주의 거룩한 시간이 얼마인가. 내게 몸을 준 숱한 생명들과 내가 낳은 시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고, 사랑하는 내 가족, 글쟁이 친구들, 눈, 비, 바람, 나무 같은 천지만물이 모두 나를 우대해주었는데 그 고귀한 신분을 망각하고 오늘처럼 아무데서나 나이를 꺼내 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마신 술과 아내가 해준 문어 안주와 내 피를 관리하던 갖가지 혈압약이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183쪽.
이 삽화에서 나는 많이 웃었다. 목욕탕 경로우대의 사건이 우주까지 확장되고, 가족과 시, 천지만물까지 거론되며 자신에게 일장 연설을 한다. 그것은 단순한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시인의 자존심이 얼마나 하늘을 찌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인뿐인가.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근본적인 자존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오래 전, 만해마을에서 이상국 시인을 만났다. 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고 속초에 있는 횟집으로 원정까지 가 뒤풀이를 하기도 했다. 그때 본 이상국 시인은 소탈했고, 재미있었으며, 단호한 면도 있었다. 어스름이 지나고 어둠이 막 깔리던 때, 만해마을 연못 앞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던 시인에 대한 인상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적과 대치라도 하듯 등을 꼿꼿하게 편 채 정면을 바라보던 그때의 모습, 분위기는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대단히 성실하다는 느낌과 아릿했던 느낌은 지금도 또렷하다.
그런 시인이, 무명작가인 내게 『국수』를 보내셨다. 내가 출간한 책을 보내면 어떤 형태로든 답을 하신다. 내가 소설집 『유리벙커』을 냈을 땐 붓글씨로 유리벙커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시기도 했다. 무명작가를 홀대하고 편 가르기를 하는 우리나라 문학 풍토에선 보기 드문 인격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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