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내용과 분량 면에서 방대하다. 1,2권으로 되었으며 한 권이 780쪽이 넘는다.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을 철학자 이진경이 풀어 해설해준 책이다. 이 책을 읽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02년에 구입해서 지금 2020년에 읽었으니 읽기까지 18년이 걸린 셈이다. 구입 당시엔 수유+너머에 다니며 공부하던 때다. 당시로부터 얼마간은 들뢰즈/가타리가 유행했고, 들뢰즈/가타리를 인용하지 않으면 권위가 없는 것쯤으로 여겼다. 내겐 감히 도전해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어떤 책을 읽는 것에도 시기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책을 구입하던 시기에 읽었더라면 아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18년의 세월 동안 나는 철학 수업을 열심히 다녔고, 누구의 이론이라는 것은 모르지만 나를 변화시킨 것만은 틀림없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 내가 어떤 인간인지 어림잡을 수 있는 능력 따위.
【노마디즘】 역시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나와 내 이웃의 관계는 어떠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것은 내가 갈 길과 이웃을 이해하고 포용해야 할 길을 암시한다. 책이 제시한대로 나는, 나와 내 이웃과 잘 사귈 수 있을까.
초반부터 내 눈길을 끄는 대목이 나온다. 히틀러에 열광하던 대중에 관한 이야기인데, 라이히가 나치즘의 승리를 보면서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에서 던진 질문이다.
“대중은 어째서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51쪽. “당시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은 나치에 의해 대중이 속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허위와 속음이 아니라 대중이 그것을 지지하고 그것에 열광했던 사실이며... 억압에 의해 성격이라는 갑옷이 된 욕망, 억압에 길든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그런 욕망을 파시스트가 포섭한 방법에 대해...”52쪽.
스피노자 역시 1670년에 출간한 <<신학정치론>>에서 같은 말을 한다. “왜 인민은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52쪽.
들뢰즈와 가타리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억압에 대한 욕망’을 말한다. 혁명과 욕망, 그것은 이처럼 억압에 대한 욕망, 혹은 억압에 길든 욕망을 혁명적 욕망으로 변형시키는 것.... 금욕에 기초하지 않은 혁명, 반대로 욕망에 기초한 혁명은 불가능한가? .... 욕망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다.....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욕망에 기초할 때 비로소 그 힘이 극대화될 수 있고 진정 혁명적일 수 있다... 53쪽.(우리의 촛불혁명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째서 자신이 억압당하길 바라는가. 아주 오래 전에 읽어 구체적인 내용은 희미하나, 에리히 프롬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떠오른다. 거기서 보면 인간은 대중에 속해야만 안심을 한단다. 즉, 홀로 자유롭기보다 대중에 구속되어야 안전하다고 여긴다고 한다. 내 이웃들을 떠올리면 대부분이 그렇다. 나치에 열광하던 대중도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겠지만,(당시 독일의 정치적 배경 상 히틀러라는 기폭제가 필요했다.) 대중이 터트리던 병적인 열광을 설명하는 부분에선 타당하다고 본다. 대중이 흘러가는 쪽에 합류해야 이상하지 않은 사람, 정의로운 사람, 애국적인 사람쯤으로 여기는 대중심리.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원하며 다른 한편 구속되길 원한다. 너무나 모순적이지 않나? 가까운 예로 결혼제도가 그렇고, 가족이라는 구성 단체가 그렇다.
여기서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수목형 인간’과 ‘리좀형 인간’에 결혼제도를 대입해 본다. 우리가 결혼 전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로운 ‘리좀형 인간’이었다면, 결혼한 후에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맞게 ‘수목형 인간’을 택한다는 말이다. 리좀형 인간이 창조적이며 울퉁불퉁한 면이 있다면, 수목형 인간은 직선적이며 우직할 정도로 질서를 추구하는 인간형이다. 자유를 원하나 구속도 원하는 인간의 이중적 모순이, 수목형 인간과 리좀형 인간에 들어있는 셈이다. 즉, 오롯이 리좀형 인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수목형 인간만 있는 것도 아니다. 둘 다 들어있는 게 인간이므로, 자유를 원하며 구속도 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튼, 나는 리좀형 인간에 관심이 많다. 수목의 기둥으로부터 뻗은 많은 잔뿌리와 가지들. 그 뿌리와 가지들이 빚어내는 여러 결과물들. 결과물을 내기까지 좌충우돌하는 과정들. 그것을 굳이 ‘탈주’ 혹은 ‘탈영토화’라고 불러본다. 이 책에서 탈주는 그저 도망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말한다. 탈영토화 역시 그와 비슷한 개념이다. 유목민이 거처를 옮겨가며 생활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노마드적 인간과 리좀형 인간, 탈주와 탈영토화의 기저엔, 새로움이라는 방향성의 바람이 항상 불고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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