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중 『녹턴』과 『남아 있는 나날』을 읽었는데 이번엔 장편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다. 한마디로 최고의 작품이다. 이렇게 섬세하고 작품성이 뛰어난 소설도 드물다. 시종 일관 잔잔한 톤이지만 핵심을 향해 나아가는 그 꾸준함과 성실함은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고도의 경지다.
글을 쓰다보면 머릿속에 든 내러티브나 표현이 자꾸 보채는 까닭에 디테일한 부분을 놓치기 쉬운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하나하나 펜 끝으로 세밀화를 그리듯 쓴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글 전체가 디테일 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은 내공이 탄탄하지 않으면,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없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힘이다. 그런 힘의 또 한 부분은, 화자(주인공 ‘나’)와 청자(독자)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끌고 간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은 이 작가/소설만이 주는 일종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격정적이지 않지만 지루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아주 작은 동작, 그저 그런 듯한 대화, 눈동자의 빛 등을 예사로 넘기지 않고 작중인물의 내면을 그려내는 점은 탁월하다 못해 경이롭다. 이러한 점도 거리 조절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 작품은 발상이 특이한데, 그 특이함을 특이하지 않게 녹여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눈부신 장점이다. 어떻게 보면 복제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은 특이할 것도 없지만, 인간에게 장기 이식을 하기 위해 인간과 ‘똑같은 성장과정’을 거치는 그 세세한 이야기는 분명 특이하다. 왜냐하면, 읽는 내내 ‘간병사’ ‘기증’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생활과 서술이라, 클론의 이야기라는 점은 눈치 채지 못했다. 다만, 뭐지? 뭔가가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2부 후반부에 가서야 복제인간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작품은 1990년 영국을 배경으로, ‘나’라는 서술자 캐시가 있고,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특이한 점을 가진 토미라는 남자, 조금은 직설적인 루스라는 여자, 이 셋이 학창시절을 지내며 겪는 이야기가 회상 기법을 통해 전개된다. 캐시는 인간에게 장기를 ‘기증’하는 일을 늦추기 위해 간병사를 택하고, 토미와 루스는 ‘기증’의 길을 걷는다. 캐시는 여러 ‘기증자’를 간병하다 루스와 토미를 간병하게 된다. 여기서 셋은 ‘헤일셤’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헤일셤’은 클론들의 기숙학교로, 셋은 어려서부터 같은 학교에서 성장하여 성인이 된다. 그들은 학창시절 내내 자신들의 존재가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헤일셤’의 규칙 아닌 규칙이다. 헤일셤 출신들(당시엔 헤일셤 말고 클론들을 사육하는 기관들이 몇 있었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헤일셤을 떠나 ‘기증’의 예비학습이 있는 센터로 간다. 거기서 누구는 ‘기증’의 길을 택하고, 누구는 ‘기증’을 늦추기 위해 ‘간병사’를 택하지만, 그래봤자 3년 정도 지나면 ‘간병사’ 역시 ‘기증’을 해야만 한다. 즉, 장기를 한 번 ‘기증’하고 죽는 클론이 있는가 하면, 두 번, 세 번 ‘기증’한 후에 죽는 클론도 있다. 루스는 두 번의 기증을, 토미는 세 번의 기증을 하고 죽는다. 그 과정에서 루스는 학창시절부터 캐시와 토미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토미를 차지해 커플로 지냈던 것을 사과하고, 캐시는 루스가 죽은 후에야 토미를 간병하며 사랑을 나눈다. 루스는 죽기 전, ‘헤일셤’의 ‘마담’으로 불리던, 학생들에겐 ‘헤일셤’의 비밀을 쥐고 있을 바로 그 여자를 만나 보라며, 어렵게 구한 ‘마담’의 주소를 캐시에게 건넨다. 덧붙여 ‘헤일셤’ 출신들이 커플이 되면 ‘기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속설을 말하며 토미와 커플이 되어 ‘기증’을 피하라는 의미를 전한다.
캐시와 토미는 ‘기증’도 ‘기증’이지만 ‘헤일셤’의 진실을 알고자 마담의 집을 찾아간다. 그 집에서 ‘마담’을 만나지만 실권은 ‘마담’이 아니라 ‘헤일셤’의 교장이었던 에밀리 선생이라는 걸 안다. 에밀리 선생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는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포인트다. 대개의 사람들은 클론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점, 클론의 후손들이 일반 인간들보다 우수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 클론들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더불어 ‘헤일셤’이 한때는 주요 인사들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유치해 운영했고, 지금은 그 당시의 유행이 그쳐 기부금이 없어 폐교했으며, 너희들은 클론 중에서도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우리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너희는 훨씬 참혹한 삶을 살았을 거며, 너희는 행복한 담보물이며, 지금은 정부가 운영하는 ‘사육장’뿐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점령군의 매뉴얼과 일치한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점령한 후, 일본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미개인으로 미개국으로 있을 거라는 말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에밀리 선생의 말에 캐시는 “마치 왔다가 가 버리는 유행과도 같군요. 우리에겐 단 한번밖에 없는 삶인데 말이에요.” 라고 말한다. 그러자 에밀리 선생은 “내 방의 창가에서 너희를 내려다보면서 여러 차례 극도의 혐오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라고 고백한다. 인간이 클론을 보는 시각의 전형성이다.
헌데 우리는 과연 에밀리 선생과 다를까? 복제인간이 보통의 인간보다 열등하길 바라지 않았나? 영혼은 없고, 혹은 필요 없고, 필요한 장기만 대주면 그만인 게 클론이라고 여기진 않았나?
여기의 핵심은 모럴의 문제보다 인간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루스가 혹은 ‘헤일셤’의 학생들이, 자신의 ‘근원자’를 찾아나서는 일은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이며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이다. 늘 문제가 되어 온, 복제인간은 인간인가 아닌가를 다시 고민하게 한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작가가, 처음부터 인간의 이야기인 양 섹스도 하고 기쁨과 소외감, 쓸쓸함과 벅참, 영혼의 좌절과 극복을 그리고 있는 점은, 복제인간도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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