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유리벙커 2023. 5. 5. 15:16

로베르토 볼라뇨의 이 소설은 독특하다. 아니, 소설인가? 하는 의아함이 드는 소설이다. 한마디로 소설의 전형성을 전복시킨 소설이다. 마치 어떤 책을 읽고 줄거리를 소개하는 듯하다. 그만큼 간략하며, 객관적이며, 사실적이다. 소설 특유의 디테일한 표현을 기대했다면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이 소설은 어느 장르에 넣기도 어렵다. 장편소설도 단편소설도 산문도 아니면서, 소설은 소설이다. 그렇다고 소위 손바닥소설이라고 단정하기엔 미진하다. 각 소설의 분량은 어느 것은 한 페이지, 어느 것은 두어 페이지 정도로 짧다. 그런데 소설의 무게감은 분량과는 다르게 제법 두툼하다. 아마도 작가의 해박한 지식에 더해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독자를 속이는 고도의 기법 때문이 아닐까 한다.

 

등장인물들은 남미 여러 국가의 시인들이다. 국적과 나이와 이름은 사실적이며, 시인들이 낸 책 이름과 출판사 이름 역시 그렇다. 자라온 환경과 에피소드 또한 팩트에 기초한다. 솔직히 얘기하면, 기초한다고 여겨지는 모종의 짐작이 작동한다. 읽는 내내 팩트인가 아닌가 자꾸 의심이 든다. 팩트인가 싶으면 아닌 듯하고, 아닌 듯하면 팩트인 듯하다. 등장인물 이름이나 책 이름을 검색해본다.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팩트 같다. 팩트 같지만 또 아니다. 굉장한 지식과 실력이 치밀하게 직조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기법이다.

 

그렇게 읽어가는 내내 어떤 나치 문학일까’ ‘누가 어떤 식으로 나치에 관한 글을 썼을까하는 궁금증은 접어야 했다. 기껏해야 한 줄 정도 그는 아리안족을 선호한다거나, 그녀는 히틀러가 어린애를 안고 있는 사진에 나온 여자애가 자신이라고 자랑한다거나 하는, 짧은 멘트가 전부다.

그렇게 3인칭 객관적 시점을 유지하다 마지막 소설 악명 높은 라미레스 호프만에선 가 나온다. ‘는 작가 볼라뇨다. 172쪽 의뢰인 로메로가 에게 하는 말,“이봐요, 볼라뇨. 당신이 먼저 그의 얼굴을 알아봐야 합니다.”

이 문장은 충격에 가깝다. 그러니까 앞에 나온 30편의 소설들은 비록 3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쓴 것이지만, 로 인해 볼라뇨가 쓴 소설로 귀착된다. 30편의 소설들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독립적인 소설이다. 악명 높은 라미레스 호프만역시 독립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이 악명 높은 라미레스 호프만에서의 는 지금까지 거쳐 왔던 소설을 한데 그러모으는 작용을 하면서, 여태까지 소개 차원으로 썼던 소설들이, 볼라뇨가 쓴 소설이며, 그 소설은 픽션이라는 게 드러난다. 대단한 직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볼라뇨가 이 소설에서 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일까.

문학이란 규정할 수 없는 차원의 세계라는 말? 이건 좀 진부하다.

그렇다면 나치 문학이라는 제목을 단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본다. 팩트에 기초해서 긴 듯 아닌 듯 독자에게 트릭을 쓴 기법이, 실은 나치들의 수법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30편의 소설에서 내러티브를 이용하기보다, 아예 책 한 권을 통째로 이용해, 독자의 허를 찌르는 이런 방식이, 바로 나치의 방식이라고 고발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이게 바로 나야. , 히틀러, 나치라고.”

 

'나의 소설 > 독서감상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0) 2023.05.31
『댈러웨이 부인』  (0) 2023.05.30
<<조용한 날들의 기록>>  (0) 2023.04.20
나를 보내지 마  (0) 2022.12.01
그토록 먼 여행  (0) 2022.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