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독후감 심사

유리벙커 2011. 6. 30. 15:35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독후감 심사를 맡았다.

본선에 올라온 28편을 꼼꼼히 읽었다.

작년에 리포트 형식이 주를 이루었다면 올해는 독후감 형식에 맞춘 글들이 많았다.

물론 편지 형식이나 일기 형식도 있었다.

그러한 형식은 형식의 다양화를 꾀하기 위한 시도인 듯하지만 

독후감만이 가진/보여줄 수 있는 개성을 표하기 어렵다.

더구나 일기나 편지 형식은 문학 형식의 최하급에 속한다.

그리고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이 강하다.

독후감은 객관성을 바탕으로 주관성이 들어있는 형식의 글이다.

그러니 일기나 편지 형식은 독후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개성을 뛰어넘지 못한 채

에세이로 끝나게 마련이다.

독후감은 에세이가 아니다.

별 거 아닌 듯하지만 독후감은 책 내용을 냉철하게 분석한 다음

자신의 감상/비판을 넣어야 한다. 물론 리포트나 논문과도 다르다.

 

 

 

 

 

심사를 맡을 때마다 아쉬운 점이 있다.

우선, 책의 이름을 적지 않고 자신이 지은 제목만 쓴 경우,

그리고 저자 이름을 쓰지 않은 경우는 너무 많았다.

쓴 글이 아무리 좋아도 그런 기본사항을 빠뜨리면

시험문제는 잘 풀었지만 이름을 쓰지 않고 제출한 것과 비슷하다.

더욱이, 베스트셀러인 책을 독후감으로 쓴 경우, 그 책의 이름 대신 그와 비슷한 제목으로 쓴 게 더러 있다.  

물론 저자 이름은 빠져있다.

그것은 너무나 유명한 책이니 굳이 제목을 쓰지 않아도, 그와 비슷한 제목을 써도 다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세종문화회관 혹은 00방송국으로 우편물을 보낼 때,

주소를 명확히 쓰지 않고 그저 세종문화회관이나 00방송국이라고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편물만 들어가면 된다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주소를 적는 일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너무 기본이어서 그런가?

책 제목 대신 자신이 붙인 제목을 쓴 작품이 1/3 정도이고 저자를 쓰지 않은 작품은 반을 넘는다.

솔직히 화가 난다.

잘 썼지만 기본도 모르는 글에 자연히 점수가 야박해진다. 

그렇다고 안 된 글을 선정하기도 그렇다.

우리가 원고지에다 독후감 쓰는 것을 배울 때는 

맨 위에다 책 제목과 저자 이름은 물론, 출판사와 발행일까지 썼다.

그런 것마저 요구한다면 구시대인이 되나?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비판 의식의 결여이다. 

읽은 책들은 시, 소설, 에세이, 인문학, 그 종류는 다양했지만 비판 의식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저자가 이끄는대로 혹은 모두가 아는 그러한 해석을 그저 그렇게 따라가는 게 전부였다.

전문가가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글의 끝에선 모두가 다 긍정적이다.

결말이 긍정이어서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비판 없는 긍정은 대중이 하는대로 따라하는, 체제에 길든 행동에 불과하다.  

그러니 자신의 색을 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동안 부모에게 잘못했지만 이젠 이 책을 읽고 반성한다,

그동안 이기적으로 살았지만 이 책을 읽고 동료를 챙기겠다,

그런 천편일률적인 독후감 일색인데, 그러한 글은 생명력이 약하다.

자신만의 글을 쓰기 위해선 자신만의 색을 가져야 하고

자신만의 색을 가지려면 이 세상을 뒤집어볼 줄 아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죽을만큼 자신을 해부하고 생각하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하고

끊임 없이 양서를 읽어야 한다. 

이게 어디 하루 아침에 될 일인가?

 

부수적인 사항이지만 서술할 때 능동형으로 써야할 것을 수동형으로 쓴 경우가 허다하다. 

아직도 일재의 잔재를 모른 채 글을 쓴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하다'라고 써도 충분한 것을 '되다'라고 쓴 경우가 있다. 

위에 적은 글을 예로 들면,

"능동형으로 써야할 것을" 대신 흔히 "능동형으로 써도 것을"로 쓴다. 

그만큼 의식하지 않고 쓴다는 반증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느끼다'로 써야할 것을 '느껴지다'라고 쓴 경우가 있다.

그것은 겸양법과는 다르다. 시간의 흐름을 담는 것과도 다르다.

느끼는 것은 '나'가 주체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앞 뒤 문장에서 어쩔 수 없이 '느껴지다'로 써야할 경우도 있다.

하나의 문장을 쓰기 위해선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습관이 필요하다.

군더더기 하나를 덧붙이면, 자기가 쓴 글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일단 주최측이 원하는대로 최우수와 우수, 장려를 선별했다.

그런데 최우수로 고른 작품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본다.

짐작대로 표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아주 질 나쁜 표절이다.

속이 상한다.

대체 글을, 독후감을 왜 이렇게까지 해가며 써야 하는가.

상금 때문에? 이름을 얻으려고?

표절작은 자격미달로 제외시켰다.

나머지 조금 미심쩍다 싶은 작품도 검색해본다.

단어 몇, 중요한 대목 몇이 눈에 띈다.

짜집기가 의심이 가는 상황.

그러나 일일이 찾아내 비교하려면 한 작품 당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결국 최우수작은 없는 걸로 하고 우수작과 장려작으로 마친다.

 

글을 쓰기까지의 정성, 그 고통은 해본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발표가 나기까지의 그 기다림은 설렘보다는 초조감을 준다.  

글을 쓰는 그 마음만 본다면 다 최우수다.  

그러니 자신을 던지고 닦는 그 일에 어찌 최우수나 우수, 장려를 매길 수 있을까.

그래서 이런 심사는 잔인하다.

 

아무리 엉성한 글이라 해도 한 두개의 미덕은 가지고 있다.

아무리 잘 된 글이라 해도 한 두개의 약점/단점은 가지고 있다.

완벽하게 안 된 글도, 완벽하게 잘 된 글도 없다.

글이라는 자체가 완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단히 글을 쓴다.

그래서 글 쓰는 일은 도 닦는 일이라는 말이 생긴 모양이다.  

스마트폰에 빠져 대화 부족, 글 부족이 만연한 이때에 그래도 글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나는 희망을 본다.

다만, 표절이나 짜집기를 죄의식 없이 하는 이 세태가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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