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메아리, 이 계절의 주인공 행세를 한다.
나쁘지만은 않다.
오 층 아파트에서 보는 빗줄기는 그저 하나의 풍경에 불과하다.
수락산이 보이는 왕복 6차선의 삼거리, 그 위로 이제 막 준공 중인 경전철, 그 뒤로 물안개,
이것들은 폭우로 쓰러졌거나 쓰러질 비닐하우스나 뚝방, 경사로에 지어진 낡은 주택과는 상관 없이 저 혼자 오붓하다.
그러니까 수해/재해를 떠나 장마, 비,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풍경이다.
이러한 풍경도 맘 놓고 즐기면 안 되는 시절이다.
풍경보다 도덕적 요구가 앞장서기 때문이다.
비를, 비 그대로 즐길 권리는 사라지고 비에 따른 손익계산서만이 중요해진다.
그래서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남몰래 비를 흠모한다.
이런 장마철엔 더더욱.
비 오는 광경을 보는데 생각지도 않게 샘이 나는 집이 떠오른다.
참으로 뜻하지 않다.
비와 샘물이 나는 집이 과연 무슨 연관이 있다고 나를 이렇게 끄적대게 하는지.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둘 다 물, 수분이라는 점이다.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이렇게 연관을 짓는 것은 약간의 억지다.
아무튼 작은 샘을 가진 집이 눈에 어른댄다.
오래 전, 전셋방을 얻으려 구기동, 세검정 쪽을 돌아다닌 일이 있다.
그때 상명대학교로 거의 다 올라가서 오른 편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작은 샘이 있는 집을 보았다.
내가 부동산에서 소개 받은 그 집의 전셋방은 반지하였는데
들어가 보니 방 앞에 작은 샘물이 있었다.
그 샘물을 보는 순간 불안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다.
우선은 항상 물이 있으니 습할 거 같았고, 축축한 벌레 같은 게 돌아다닐 듯했다.
그러나 항상 샘물을 끼고 사니 얼마나 풍요로운가,
또한 샘에서 끊임 없이 받을 그 신비로움은 또 얼마나 벅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극한의 이 두 가지 감상 중 하나를 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벌레만 제외한다면 꼭 가지고 싶은 방, 아니 집이었다.
그 집에 샘이 있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산에다 집을 지으면서 샘이 나는 곳을 메우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다.
종종 그 집이 생각난다.
밖에 내리는 저 굵은 빗줄기를 우리집 거실에다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조금은 어두컴컴했지만 졸졸 흘러내리던 그 작고 맑은 샘이 우리집 거실 복판에도 있었으면 싶다.
그보다, 그러한 샘 하나 가슴에 품고 살면
수시로 냉기와 한기에 시달리는 내 전두엽에도 오아시스를 두는 셈이 되지 않을까.
그 샘에 욕심이 난다.
욕심, 그것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
어떠한 욕심이냐에 따라 다르다는 말은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
지금은 그저 그 샘에 욕심이 난다는 것뿐.
지금은 빌라가 들어섰을지도 모를 그 집,
그래서 확인하기가 두려운 그 집,
내 의식에서 하나의 욕심으로, 꿈으로, 신비와 갈증을 주던 그 집을,
나는 비바람이 휘모는 밖을 내다보며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