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주의 다락방엔 (둘)

유리벙커 2011. 7. 16. 02:54

 


언니와 함께 찾아간 내 다락방, 그 유년시절의 집은 겉모양만 살짝 바뀌었을 뿐 그대로였다. (담은 벽돌담이 아니라 하얀 타일로 바뀌었고 대문은 나무대문이 아니라 철대문이 되어 있었다.)

우선 안도감이 들었다. 요즘처럼 땅 몇 평만 있어도 빌라로 바꾸는 세상에 아직도 그때의 집이 그대로 있다는 건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집 양 옆은 빌라로 바뀌어 있었다.

언니와 집 앞을 서성이며 옛 시절을 얘기했다. 여름이면 저 창문을 통해 아이스케키를 사먹었다는 얘기, 커다란 개를 키우던 얘기, 그 개는 어째서 그렇게 가죽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뜯어댔는지 아버지 구두며 토방에 벗어놓은 구두란 구두는 몽땅 다 뜯어 못 쓰게 했다는 얘기, 겨울이 되면 김장을 하려고 꽃밭을 파 항아리를 묻었던 얘기, 그때 땅을 팠던 건 아버지였는지 누구였는지 생각이 안 난다는 얘기, 엄마는 항상 화장을 했고 일을 할 때도 늘 한복차림이었다는 얘기, 마당에 있는 펌프를 누를 땐 한복치마 한쪽을 홱 돌려 끈으로 잡아맸다는 얘기.... 그리고... 집에 처음 텔레비전을 들여놓던 날, 식구들이 둘러앉아 티브이를 볼 때 기생충에 관한 프로가 나왔는데, 그걸 보던 내 입에서 회충이 나왔다는 얘기....(그땐 정말 끔찍했다.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는 그 징그러운 것을 엄마가 손으로 빼냈다.) 나는 언니는 그거 기억하냐고 묻고, 언니도 그때를 기억한다는 얘기.... 

얘기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다행이 철대문은 살짝 열려있었다.

언니와 나는 대문 사이로 얼굴을 디밀었다.

어릴 때 보았던 우리집이 아니었다.

그렇게 컸던 마당은 아주 작았고 토방이며 방은 그대로였지만 그것 역시 작았다.

토방이 아직도 그대로인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그런데 그때의 우리집은 가정집이 아니라 무슨 가내공업을 하는 사업장으로 쓰이는 듯했다.

토방엔 납품용인지 굵은 테이프로 묶어 둔 박스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부엌이며 안방, 건넛방, 아랫방, 사랑방은 그대로였다.

안방과 건넛방 사이에 있는 마루에도 물건 박스로 지저분했다.

저 마루엔 아직도 ‘내 다락방’이 여전하다.

그때, 우리가 살던 때엔 마루에 침대가 놓여있었다.

 

(마루 위에 침대, 침대에서 내 머리를 빗겨주는 언니, 그 옆에 작은오빠, 침대가 놓인 벽엔 미애네를 볼 수 있는 창이 있다.) 

 

침대에 올라서면 대령집이라 불리는 옆집 미애네가 보였다.

창이 있었지만 한눈에 볼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유리창 앞엔 끝이 삼각형으로 된, 직사각형 나무가 여러 개 묶인 그런 나무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말하자면 프라이버시를 생각한 그런 창이었다.

나는 침대에 올라서면 까치발을 해가며 창에 얼굴을 댔다.

나무로 된 창 사이로 미애네 마당에 있는 그네가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말했다. 얼른 내려오라고. 남의 집 내다보는 거 아니라고.

엄마는 내가 미애네 그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타러 오라고 하길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다 미애가 놀러오라고 하면 나는 그네가 타고 싶어 한달음에 가곤 했다.

그 미애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고무신을 하이힐이라며 뒤축을 꺾어 신고, 손수건에는 모래를 담아 머리에 이고 “떡 사세요, 떡 사세요,” 해가며 오동나무가 있는 집 앞으로 가 소꿉놀이를 했던 그때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안타까움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한 것이 슬몃 목젖으로 몰렸다.

집을 보며 이런저런 말을 나누고 있을 때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수상쩍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언니는 우리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라 와 본거라고 말했다.

집주인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우리를 보던 사람은 그 말을 듣더니 표정 없는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김에 언니와 나는 집 구경을 중단하고 구멍가게를 찾았다.  

구멍가게가 있던 자리라고 짐작하는 그곳엔 생뚱맞게도 몇 층짜리 건물이 세워져 있어 도무지 그 자리가 그 자리 맞는지 헷갈렸다.

내가 동네 애들이 던지며 놀던 야구공을 얻어맞았을 때, 옆에 있던 전봇대는 사라지고 없었다. 작은오빠가 그 전봇대에 불이 켜지도록 딱지치기에 여념이 없던 그 길은 너무나 초라하게도 작았다. 외등 아래서 술래잡기를 할 때 영자 언니(그때는 식모라고 불리던 언니)가 날 찾던 목소리는 간 곳이 없었다. 그 언니의 누렇게 바랜, 길게 하나로 땋은 굵은 머리가 눈앞에 아슴하니 떠오른다. 4.19가 나던 날, 대문 앞에서 날 업고 성신여대 뒷산으로 오르던 데모대며 뒤를 쫓던 경찰들이며..... 그때 영자 언니는 말했다. “애기들은 저런 거 보면 안 돼” 그러면서도 경찰이 총을 쏠 때까지 보고 있던 영자 언니.     

영자 언니는 지금쯤 일흔이 넘었거나 고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영자 언니.

보고 싶은 건 영자 언니뿐이 아니다. 멋쟁이로 유명세를 떨치던 핸섬파 우리 아버지, 그리고 늘 고운 태로 단아했던 우리 엄마. 그분들을 볼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프다. 

나의 다락방, 그 기억의 창고엔 아직도 풋풋한 살냄새로 가득 차 있건만 나는 이렇게 회상하는 것밖엔 할 게 없다.

그래도, 다락방을 가지고 산다는 건 축복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나는 다락방에서 산 적이 있다. 아주 잠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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