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이 얼마나 향수를 자극하는 말인가.
추운 겨울, 따뜻한 군고구마를 품에 넣고 집에 가는 길이 다락방이다.
한여름, 뙤약볕 수돗가나 우물가에서 아들과 남편에게 등목을 시켜주는 게 다락방이다.
어쩌면 우리는 생의 첫발에서부터 이미 이러한 다락방을 가지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침전될 때, 혹은 과부하가 됐을 때, 이러한 다락방은 우리를 견뎌내고 지켜내게 했던 하나의 등불이었으리라.
어린 시절 나의 다락방은 더없이 정겹다.
‘신경질가다’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나는 신경질이 많은 울보였다.
왜 그렇게 울었을까.
이가 아파서, 언니들만 선글라스를 사줬다고, 엄마 대신 할머니가 유치원을 데라다 준다고,
유치원 그네를 빼앗겼다고, 언니들이 나를 빼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고, 이유도 참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잘 울었던 건 몸이 부실해서였다.
자고 일어나면 어딘지 모르게 몸이 안 좋았다.
지독한 편식에다 끼니를 잘 걸렀으니 피곤했던 탓이리라.
대여섯 살짜리가 피곤이라....
그런데 정말이지 항상 몸이 개운치 못했다.
그래 그런지 밥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탕에만 관심이 있었다.
밥을 안 먹을 때마다 엄마는 밥공기를 들고 따라다니며 달래기도 하고 협박도 했다.
할머니는 “아이고 맛있구랴, 짭짭, 아이고 맛있구랴, 짭짭” 그러시면서
내 밥공기에서 밥을 떠 드시는 시늉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입을 꼭 깨물며 쌩~ 돌아서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하니 바로 우리 아이 어렸을 때가 나 어렸을 때와 똑같다.)
결국 엄마와 할머니의 작전은 안 먹혀들었고
마지막 수단으로 엄마는 일 원짜리 지폐를 꺼내 나와 거래를 시작했다.
“밥 먹으면 이것 주지~”
그때의 일 원짜리 지폐는 연보라색 빳빳한 신권이었다.
항상 신권. 지폐 가장자리에 손을 베일 정도로 은행에서 집으로 직행한 신권.
아버지는 월급을 타 오시면 항상 일 원짜리 신권으로 바꿔오셨다.
오빠와 내 용돈을 준비해 오신 것이다.
그것을 엄마에게 맡겼고, 엄마는 그것을 장롱 한쪽에다 얌전히 놓아두고 있었다.
장롱을 열면 늘 그 연보라색 지폐가 있었다.
그 옆엔 24색 크레파스와 제일 좋은 스케치북, 화판이 쌓여 있었다.
당시엔 크레파스라기보다 몇 개의 색이 전부인 크레용과 마분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그런 것들을 사다놓으셨다.
나는 화판과 스케치북을 들고 옆집 친구와 곧잘 동네 뒷산으로 갔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그림을 그린답시고 똥폼을 잡은 것이다.
그림이 뭔지도 모른 채 산 중턱 바위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친구와 얘기를 나눴다.
“얘, 문둥이가 이렇게 꽃 필 때면 아이들을 잡아간대. 애들 간을 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고 애들을 잡아다 죽여서 간을 쏙 빼먹는대.”
그런 말을 나누며 나와 친구는 겁을 잔뜩 먹은 채 바위 옆에 핀 진달래를 보기도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그때 저만치서 어떤 아저씨가 어른댔다. 나와 친구는 시껍을 해 산을 내려왔다. 그 후로 몇 번인가 화판과 스케치북을 들고 산을 올랐지만 그때마다 그 말이 생각나 그림 그리기는 그만두었다.
다시 일 원짜리 지폐로 돌아가 본다.
나는 밥 몇 술을 뜨나마나 한 후, 기어이 일 원짜리 지폐를 받았다.
받자마자 나는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갔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눈깔사탕’ 때문이었다.
내 입보다 더 큰 그 ‘눈깔사탕’엔 굵은 설탕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나는 일 원을 주고 그 눈깔사탕을 샀다.
눈깔사탕을 입에 넣자 입이 터질 듯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 사탕을 입에 물고 구멍가게를 나왔다.
사탕을 굴려보지만 굵은 설탕 탓에 입안은 헤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는 너무나 좋았다. 그 순간을 행복이라고 말해도 된다.
덕분에 충치가 생겼다.
사탕만 샀다 하면 그 큰 것을 물고 낮잠을 자니 당연했다.
자고 났을 때 입안은 퉁퉁 부었고 어느 날인가부터 이가 아팠다.
기어이 엄마 손에 잡혀 치과로 갔다.
그때 어린 내가 본 치과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의 공간, 바로 그것이었다.
진료용 의자는 의자가 아니라 기계였다. 사람을 고문하는 기계.
엄마인지 의시인지 모를 손에 잡혀 그 의자에 앉았다.
무서웠다. 벌벌 떨게 무서운 게 아니라, 치를 떨게 무서운 그런 무서움이었다.
진료를 마치며 의사가 말했다.
일단 이를 갈아야 한다고. 이를 갈 때 시큰거리며 좀 아플 거라고. 지금 할 거니 옆에서 잘 잡아주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치과를 뛰쳐나왔다.
뒤에서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나는 거의 울면서 전차종점을 지나 집으로 뛰었다.
엄마가 언니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쟤, 사탕 먹게 하지 마라.”
나의 ‘눈깔사탕’이 있던 구멍가게.
환상으로 온통 나를 사로잡던 그 컴컴한 공간.
오만잡동사니가 지저분하게 널려있었지만 딱 다락방을 닮은 어둑진한 공간.
그 공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니, 그리워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느 핸가 나는 언니와 함께 내 유년시절이 녹아있는 바로 그 집을 찾아갔다.
내 다락방은 그렇게 뒤로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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