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이 이틀 남았다.
한 해가 저물 때면 항상 떠오른 질문 하나, “한 해 동안 뭘 했지?”
매년 하는 질문이건만 만족할 만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를 위해’ 이리저리 답을 생각해 낸다.
봄엔 원하던 책을 냈고, 초여름엔 아들 결혼을 시켰다.
이만하면 한 해를 정산하는 것치곤 부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적인 사실만으로는 답이 충분하지 않다.
영혼을 살찌우던 일은 없었을까.
마음을, 대청마루에 펼쳐놓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여유를 부리던 때는 없었을까.
그것은 어느 친구의 말처럼 ‘주인으로 사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주인으로 살기.
이 얼마나 황홀한 이야기이며 다다르기 힘든 일이란 말인가.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관계를 의식하며, 누군가에게 휘둘리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니 ‘주인으로 살기’는 요원한 꿈처럼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일찌감치 그런 사실을 알아 이런 말을 했던 모양이다.
“삶은 기만을 원한다.”
나는 그 ‘기만’ 속에 ‘주인으로 살기’가 가만히 숨죽이며 있다고 생각한다.
한 해, 일 년이라는 말은 결국 인간이 숫자로 계획한 프로그램이다.
숫자란 끝나는 법이 없다.
무엇과 무엇으로 갈라놓는 것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굳이 한 해, 올 해, 일 년, 새해, 묵은 해, 그런 식으로 구분한다.
‘안녕’이라는 말도 마찬가지.
‘안녕’이라는 말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좋은 안녕’과 ‘나쁜 안녕’으로 갈라 말한다.
이유가 있다.
몇 년 전, 나는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그 친구와 나는 종종 이메일을 했다.
헌데 그 친구는 습관이었겠지만 편지 끝에다 늘 “안녕”이라고 썼다.
잘 지내라는 뜻으로 썼을 그 안녕에 나는 뭔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이것으로 끝이란다, 이것으로 마지막이란다, 그런 음성이 들어있는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친구,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런 후부터 나는 편지 끝에다 안녕이라고 쓰는 걸 싫어한다.
어느 작가 선생님도 편지 끝에다 안녕이라고 쓰는데, 나는 그 선생님께 부탁했다.
편지 끝에다 안녕이라고 쓰지 말아달라고.
편지 첫머리에 쓰는 안녕과 끝에다 쓰는 안녕은 확실히 다르다.
만나서 “안녕” 하는 말과 헤어질 때 “안녕” 하는 말의 뜻을 글자는 담지 못한다.
글자엔 음성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알아서 새겨듣긴 하지만 그래도 내겐 안녕이라는 말이 조심스럽다.
2011년에게 “안녕”을 고할 시간이 다가온다.
2012년에게 “안녕”을 고할 시간도 다가온다.
살아온 날, 살아갈 날의 답을 나는 이 “안녕”에 담으려 한다.
‘좋은 안녕’과 ‘나쁜 안녕’은 없는데도 나는 부득부득 '좋은 안녕'으로 2011년과 2012년에 인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