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도 질 때가 있는가 하면,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을 때도 있다.
오래 전 얘기다.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지금도 종종 그 때의 일이 생각날 때면 그 때는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 때, 나는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가 멍~ 해오면서 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아, 또 그 증상이 시작되는구나.
두려움이,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 엄습했다.
한 쪽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사람들의 모습도 안 보이고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서 식은땀이 솟았다.
그게 전부였다.
내 의식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얼마가 됐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내게 큰소리로 말했다.
“정신이 드세요? 119를 부를까요?”
그러니까 그동안 나는 정신을 잃었고, 누군가가 그런 내게 말을 붙이는 중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라고 의사를 전하고 싶었지만 손끝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마 고개를 조금 움직이는 것으로 의사를 전했던 듯싶다.
내게 말했던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119를 부르는 소리가 났고
나는 다시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졌다.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체면이며 상식 같은 건 무용지물이었다.
옆에 누가 앉았는지도 모른 채 옆 사람에게 몸을 기댔다.
옆에 앉은 사람은 중년의 남자였던 듯하다.
그 남자와 119를 부르던 남자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앉았다가 쭈르르 미끄러지더니 머리를 꽝 다쳤어요. 아마 졸다가 그렇게 된 거 같아요.”
나는 졸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나를 얘기하기란 불가능했다.
말은커녕 눈꺼풀 하나도 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극히 드물었지만, 젊었을 때도 나는 쓰러진 적이 있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른 채 지금까지 산 셈이다.
어쨌거나 나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두 남자가 내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여자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네요. 남자라면 들쳐 업으면 되는데...” 라는 소리가 났다.) 지하철에서 내렸다.
지하철 밖 간이의자에서도 나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옆 사람에게 눕다시피 기대었다.
전동차에서 나를 부축했던 남자가 말했다. “저도 같이 옆에 있어주면 좋겠는데요, 바쁜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고 6월 초의 날씨가 무색하게 추웠다.
그렇게 119가 오길 기다리는데, 전동차 오가는 소리가 났고 옆의 남자가 혼잣말 하는 소리가 났다. “아이, 왜 이렇게 119가 안 오지?” 그러면서 다시 119에게 연락하는 듯했다.
그 남자야말로 나보다 더 119가 오길 기다렸을 것이다.
생판 모르는 여자가 마치 애인인 양 몸을 기대고 있으니 얼마나 민망하고 창피스러웠을 것인가.
얼마 후, 119가 왔고 나는 119대원의 등에 업혀 지하철 계단을 올랐다.
119대원의 가쁜 숨소리가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고맙고 미안하기 짝이 없다.
축 늘어진 사람을 업고 계단을 오른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가.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나는 그 대원의 등이 업힌 동안 바늘방석에 누운 기분이었다.
눈은 뜰 수 없었지만 의식만은 분명했다.
구급차를 타기 전, 119대원이 내게 말했다.
“가족한테 연락을 해야 하는데 핸드폰을 찾겠습니다. 핸드폰이 백에 있습니까? 백을 열겠습니다. 지금 핸드폰을 쓰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가족과 연락이 닿아 한양대 응급실로 갔다.
119대원은 나를 들것에 싣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응급실에서 나는 채혈을 하고 뇌 CT를 찍었다.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모든 게 정상으로 나왔다고 했다.
다만, 부교감신경이 약해서 스트레스나 과로가 있으면 어느 때라도 이렇게 쓰러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일단 아무 이상이 없다니 안심이 됐다.
퇴원을 하고 나오면서 나는 지하철에서 119를 불러주었던 사람,
내 곁에서 119가 오기까지 기다려주었던 사람, 등을 내주었던 119대원이 생각났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가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지만 누구였는지 알지 못하니 그럴 방법도 없었다.
다만, 119대원의 경우는 찾으면 찾을 수 있었겠지만 용기가 없어서 그냥 묻어두고 말았다.
지금도 그들에 대한 감사는 말이 모자란다.
혹여 어떤 우연이 작용해서 그들이 내 블로그를 방문한다면,(그럴 경우는 거의 희박하지만) 연락을 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진정, 정성을 다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또 하나의 경우다.
운전이 거의 생초보였을 때다.
차를 가지고 시내로 나갔다.
부득이한 경우여서 퇴근 시간과 맞물였다.
차는 종로4가에서 정지신호를 받고 있었다.
사거리는 차들로 빽빽하고 제때 신호를 받는다쳐도 이번 신호에 사거리를 건널 수 있을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신호가 떨어졌다.
하지만 앞차는 움직일 줄 몰랐다.
겨우 앞차가 가자 나는 앞차를 따라 갔다.
사거리 복판에서 정지신호로 바뀌었다.
나는 사거리 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그냥 서있기만 했다.
앞차는 어느 새 겨우 빠져나갔고,
원남동 쪽에서 대기하던 차들은 미친 듯이 속력을 내며 직진했다.
그리고 종로로 좌회전하려던 차들은 내 차 때문에 좌회전을 못해 빵빵거리며 난리를 쳐댔다.
나는 직진하던 차들이 워낙 속도를 내는 바람에 앞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뒤로 가려고 해도 뒤차에 막혀 갈 수도 없었다.
그때, 직진하던 차들은 나를 흘깃거리며 야유 섞인 눈총을 퍼부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그런데 직진하던 차 중 어떤 차가 내 앞에서 정지했다.
그러니까 그 차는 내가 앞으로 빠져나갈 수 있게 직진하던 차를 막아주려던 의도였다.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나는 그 남자 운전자에게 고맙다고 할 양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과 동시에 그 운전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외면했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저 여자, 얼마나 속이 탈까.... 싶어 도와주는데, 그런 자신이 면구스러웠던 것이리라.
어쩌면 자기 아내를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겪었던 일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 운전자 덕에 그 무지막지한 순간을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여자 운전자를 김여사네 뭐네 얕잡아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김여사’를 도와주기보다 비난에 열심이다.
아무리 베스트 드라이버라도 그들 역시 ‘김여사’ 즉, 초보를 겪지 않고는 베스트가 될 수 없다.
나처럼 그렇게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센스로 도와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게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격이 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세상이 야박하게 돌아간다지만,
표내지 않고 약자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세상 어느 곳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아마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닐까 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넉넉한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들에게 나는 늦었지만 진심을 다해 감사한다.
앞으로도 나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그 고마움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염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