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천천히 안기는 중

유리벙커 2016. 1. 6. 00:42

 

 

 

『천천히 안아주는 중』의 저자 박남희 철학자는 지성과 부드러움을 함께 지진 분이다.

본분 138쪽을 인용해서 말하면 ‘아름’ ‘다움’의 사람이다.

 “아름다움이란 ‘아름’과 ‘다움’의 합성어로, 저마다의 ‘아름’이 모여 같이 ‘다함’을 이루어가는 것을 뜻”한다. 171쪽의 말을 더 인용하면 “사람은 그것에 자신이 보낸 시간만큼 그것이 되어 사는 것”이라는 말처럼

박남희 선생님의 인상은 그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한눈에 느끼게 한다. 참으로 분위기 있는 분이다.

 

 

『천천히 안아주는 중』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함과 지성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라고 강변하지도 않는다.

마치 비 오는 날, 차창에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을 마주 놓고 도란도란 얘기하는 듯하다.

어떤 해답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라고 깊이 잠든 의식을 깨워준다.

 

 

마음을 많이 다쳤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철학에서 답을 얻으려 한다.

‘진리’라 일컫는 것들과 마주하여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답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답을 얻고 싶은 마음보다 상처 받지 않을 ‘방법’을 구했던 듯하다.

『천천히 안아주는 중』을 펼칠 때만해도 그랬다.

지금의 내 무게를 조금 덜 수만 있다면, ‘나’를 위로해 줄 어떤 말이나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표지를 펼쳤다.

소제목이 눈을 확 잡아끌었다.

 

왜 이렇게 아프죠?

내 삶이 왜 내 뜻대로 안 될까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어

세상에 슬픔이 없을 순 없을까

죽으면 정말로 끝인 걸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소제목에 그대로 나왔다.

이게 어디 나뿐일까.

 

 

왜 이렇게 아프죠? 의 서두는

우리는 어디가 아픈가.

몸인가 마음인가.

로 문을 연다. 그리고 마무리는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나인가요, 남인가요. 다.

그 다음 장을 여는 글은

아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

질문으로 시작해 질문으로 맺는다.

답을 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생각하기’를 통해 스스로 답을 찾기를 바라는 것이다.

성급한 사람은 양이 차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방법이야말로 우리(독자)를 존중한다는 뜻이고 생각한다.

우리는 배고플 때 울면 먹을 것을 주거나 장난감을 주어 달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처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일반화의 오류를 버젓이 무슨 진리인 양 발포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자기계발서야말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을 획일적 존재로 묶어, 그물에 가두고는 똑같은 사료를 뿌려 양식하려는 작태로 본다.)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어 챕터 서두에는

사람을 알 수 없어 슬픈 날,

한 번쯤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라고 묻는다. 그리고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라고 맺는다.

그런 후 본분으로 들어간다.

정말 내 것 같은 나의 마음도 때론 낯설 때가 있습니다. 옆의 친구가 잘되었을 때, 나는 정말 축하해주고 싶지만 괜히 질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면 자기 자신이 낯설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친구의 성공을 질투하는 마음이 나인 것일까요, 아니면 스스로를 당혹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더 나에 가까운가요. 라고 묻는다.

여기서 박남희 철학자는 어떤 게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누구든 겪었음직한 일을 통해 ‘무수히 많은 나’를 만나고 ‘날것 그대로의 나’를 직시하게 한다.

나는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한다.

굳이 외면하고 감추려던 나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세상에 슬픔이 없을 순 없을까 챕터에는 낙타와 사자 이야기가 나온다.

낙타는 사막에 삽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낙타와 사막의 관계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나요. 낙타는 등에 혹이 있어서 사막에 살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막의 삶을 견뎌야 하니까 혹을 가지게 된 것인지 말입니다. (중략) 반면 사자는 초원에서 삽니다. 초원에는 많은 동물들이 모여들어 생존 경쟁이 심하지요. 사자는 동물의 왕으로 불릴 정도로 사나우니까 이 초원에서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초원에 살기에 사나워진 것일까요. (중략) 낙타가 초원으로 갔을 때와, 사자가 사막으로 떠났을 때, 둘은 무엇을 어떻게 하며 지낼까요. 초원에서 낙타가 이전의 습성대로 산다면 먹지 못해 굶어죽게 되겠지요. 사막에서 사자가 예전처럼 먹이를 찾아 쏘다닌다면 더위에 지쳐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살기 위해 낙타는 사자처럼 빨리 달리고 사나워질까요, 사막에 간 사자도 낙타처럼 천천히 걸으며 온순해질까요. (중략) 사막은 자기의 길을 혼자 힘들게 걸어가야 하고, 초원은 다른 동물들과 끊임없이 경쟁하여야만 하는 곳입니다. 사막은 힘들게 노동을 해야 하지만 깊이 있는 물을 길어 올리듯 삶의 의미를 건져낼 수 있고, 초원은 배는 부르지만 깊이를 모르는 경박함이 넘칩니다. 또한 사막은 주변의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고 관계도 맺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만 있는 듯하고, 초원은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있으나 결국 혼자이어야 하는 곳입니다. (중략) 낙타는 사막에서 사막만 생각합니다. 사자는 초원에서 초원만 생각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요. 사람은 사막에서 초원으로, 초원에서 사막으로 사는 곳을 옮겨가기도 하고, 때론 사막을 초원으로, 초원을 사막으로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위의 삽화는 나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가. 내가 나의 환경을 만드는 것일까.를 바탕에 두고 한 얘기다.

나는 그보다는, 환경을 통해 사람의 사고는 능동적이며 다양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느 한곳에 있으면 본의든 아니든 그곳의 영향을 받는다.

그곳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곳의 방식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는 뜻이다.

즉, 그곳만을 알 때는 그곳만의 방식/사고에 길들여지게 되면서 자연스레 편협적이 되고, 편협 된 사고는 자신은 물론 주변인마저 힘들게 한다.

내가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혹시 내 위주로, 하나의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본다.

 

 

이 책에는 어떻게 하라는 똑떨어진 답은 없다.

어떤 사람도 사물도 존재 그 자체가 소중하다고 말한다.

존재/존재자는 거저 있는 게 아니라 애씀을 통해 있다고 말한다.

애쓰는 존재들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부족해서 뭔가를 이루고자 애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 애씀이야말로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데 이런 생각이 난다.

『천천히 안아주는 중』에 천천히 안기기.

내가 받았다고 여기는 상처를 안아주고 안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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