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은봉 시인으로부터 시집 『봄바람, 은여우』를 받았다.
봄바람, 은여우라니, 뭐 이렇게 어여쁜 제목이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봄바람, 은여우>에는 깍쟁이 은여우가 나온다.
“발톱을 세워 가슴 한쪽 칵, 할퀴어대며 꼬라지를 부리는 은여우”가 제법 끼를 부린다. 그뿐인가? “질투심 많은 새침데기 소녀다” “짓이 나면 솜털처럼 따스하다가도 골이 나면 쇠갈퀴처럼 차가워진다”
우리는 이은봉 시인의 출판기념일에 모여 식사를 한 후 차를 마셨다.
그때 어느 시인이 이 시를 읽었고, 나는 그 대목에서 “오, 나네, 나야”하고 웃었다.
또 어느 시인은 “선생님, 은여우가 누구에요? 어떤 여자에요?” 하고 물었다.
그 말에 이은봉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여자라기보다 우리의 역사를 쓴 겁니다.”
아하, 알겠다. 그러니까 현 정치의 모습이 봄바람처럼 변덕스럽고, 우리를 깜빡 넘어가게도 하지만, “그녀는 발톱을 숨기고 달려오는 황사바람이다”에서처럼 우리를 미혹하게도 한다는 말이다.
나는 시집을 잡으면 이런 생각을 한다.
시는 한꺼번에 읽어치우기보다 야곰야곰 곰 삭여 가며 읽어야 제 맛이 나는 거라고. 마음을 다쳤을 때, 속이 허해 잠 못 이룰 때, 일이 종잡을 수 없게 뒤죽박죽일 때, 나는 시집을 연다. 거기엔 나를 슬며시 건드려주는 마음들이, 두런두런 숨어있다. 소설은 내러티브와 은유가 있어 재미를 주지만, 시는 재미는 아니고, 마음을 쓰담쓰담 해준다. 거기다 공감까지 더할 때는 작가를 만나고 싶은 욕망에 훌쩍 월담한다. 내게는 <그냥 그렇게>라는 시가 그렇다.
<그냥 그렇게>
그냥 그렇게 노래하며 놀리 온갖 설움, 그것이 만드는 꿈이며 이상 따위 다 내려놓고 푸르른 창이 되리
창이 되어 텅 빈 하늘이나 바라보리
더러는 새하얀 뭉게구름도 바라보리
다시 또 밤이 오더라도 더는 들뜨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리 어둠 속에서
어둠을 딛고 반짝이는 별이나 바라보리
그냥 그렇게 텅 빈 하늘이나 사랑하며 살리
그냥 그렇게 놀며 노래하리 온갖 열정, 그것이 만드는 고통이며 고뇌 따위 다 잊고 느리게 부는 바람이 되리
바람이 되어 먼먼 허공이나 흘러 다니리
서러운 세상, 지친 운명이나 실어 나르리
폭우가 쏟아지더라도 더는 흔들리지 않고
넘치지 않으리 황톳물 속에서도
황톳물과 함께 오직 바람의 마음으로 떠 흐르리
그냥 그렇게 탁한 세상이나 웃으며 살리
살다 보면 언제인가는 또다시 푸르른 목소리로
세상 사랑할 수 있으리 노래할 수 있으리.
위의 시는 내가 쓴 소설 주인공의 내면과 문장과 너무나 닮아 흠칫 놀랐다. 나뿐 아니라 어느 누구들도 이런 마음이었던 때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 공감을 또 하나의 시가 대변한다. 짐작컨대, 어느 누구들도 이러한 경험을 종종 했으리라 여긴다.
<시냇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흐르는 물속에 내 더러운 몸, 풍덩 집어넣고 싶었다 시냇가의 버드나무 잔가지처럼 물속에 집어넣고
두 손으로 콱콱 비벼 빨고 싶었다 깡마른 종아리, 새치 많은 머리칼, 피 묻은 가슴까지
비애여 눈 뜨고 있어도 울컥울컥 목구멍 치밀고 올라오는 설움이여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허공중에 떠 흔들리는 마음이여
흔들리는 마음까지, 마음이 만드는 내일까지, 내일의 헛된 꿈까지 흐르는 물속에 풍덩 집어넣고 싶었다
시냇가의 버드나무 잔가지처럼 나를, 내 몸을 물속에 집어넣고 쾅쾅, 방망이로 두드리고 싶었다
내일이여 눈 감으면 더욱 솟구쳐 오르는 꿈이여 시냇가의 버드나무 잎새처럼 흐르는 물 위로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절망이여.
그렇다. 우리는 어째보지 못하는 존재. 겉으론 그럴싸하게 말하고 온갖 치장을 해도, 우리의 속은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는 괴롭다. 나를 더욱 나로 볼 수 있는 그 시간들 앞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은봉 시인 역시 자신을 야단치는 자신의 목소리들에 저리 힘들어 한다.
그러나 자 보자. 그래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은가. 나를 지청구하는 ‘나’는 내게 좋은 무기가 아닌가.
이은봉 시인에겐 다른 의미에서의 두 가지 무기가 있다.
하나는 명품 웃음이다. 그 웃음은 무장해제를 시킨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 까마득한 후배나 신인에게도 격의 없이 대한다. 다시 말해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한다. 그러한 자세는 경계심을 풀게하고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급이나 스펙 따위는 힘을 못 쓴다. 한마디로 인격이 두툼하다. 두툼한 시가 시인을 자꾸 부른다. 다음에 나올 시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