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숲이 있는 거울

유리벙커 2016. 7. 7. 00:36



우리가 제일 많이 보는 것은 거울.

거울은 나이를 먹지 않지.

십 년 전에 산 거울도, 어제 산 거울도, 거울엔 나이가 들어 있지 않지.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거울을 봐도 내가 언제 이렇게 늙었는지,

언제 이렇게 고약하게 표정이 굳어졌는지 모르지.

거울 때문이야.

나이가 없는 거울 때문.

우리는 무척이나 거울을 사랑하지.

거울에 비친 점 따위, 다크서클 따위, 별 거 아니야.

행여, 거울을 보며 너 자신을 보길 바란다면 그건 과욕이야.

거울은 그냥 거울인 걸.

백 년 후에 어떤 사람이,

백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사용한 거울을 들여다본다고 상상해봐.

그래봐야 그 거울이 그 거울인 걸.

그 거울이 아닌 다른 거울을 보고 싶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차옥혜 시인으로부터 『숲 거울』시집을 받았다.

매일 봐서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닌 숲 거울.

숲 거울엔 바람이 일렁인다.

구름도, 이름 모를 풀꽃도, 위대한 사상의 숨결도,

어머니의 애절함도, 국가에 희생된 어린 생명의 노란 리본도,

50세를 먹은 가계부의 재도 날린다.

늘 자유를 원하던 나직한 음성이, 숲 거울 안에서 차근차근 길을 밟는다.

자연이 애틋해서, 진정 자유가 그리워서, 아뜩하게 고독해지는 순간.

그 순간을,

바람이 몸으로 찾아와 시인에게 새겨준다.



<바람의 문신>

바람은 내가 부르지 않아도

내게로 와

내 슬픔과 기쁨을

내 절망과 희망을

제 몸에 새긴다



천 년 후 어느 누가

바람의 문신을 해독할까

나를 만날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바람은

오늘도 제 몸에 나를 새긴다


...............................


바람이 주체가 된 시.

그 주체가 되고픈 시인의 염원.

연약해진 육체가 가고 싶어 하는 길.

차옥혜 시인의 건강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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