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번역의 힘

유리벙커 2016. 8. 19. 02:35

 

생각해 보면, 언어란 참으로 신비롭다.

생각과 말을 문자화하려는 생각 자체가 엄청난 신비이자 창조이다.

그 언제부터인지, 누가 그러한 생각을 했나 모르지만

각 나라마다 언어가 있다는 것은 생각과 말을 문자화하려던 공통된 생각이리라.

(물론 언어는 있으나 문자가 없는 나라도 있긴 하다.)

여기에서 번역이라는 제2의 창작이 나온다.

각 나라의 언어를 자국어로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다.

텍스트가 가진 나라의 풍습과 역사를 알아야 하고,

저자의 언어 습관과 그동안 출간했던 책의 흐름을 관통해야 한다.

이런 어려움이 있는 이유에서도 그렇지만, 번역 한 책을 통해 세계 각국의 문학과 철학을 배울 수 있기에 번역한 책을 읽을 때마다 뭉클, 번역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돈이 많으면 최고의 번역원을 세워 번역자를 최고로 대우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번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얼마 전 몇 권의 번역작을 읽었다.

일본, 수단, 터키, 베트남, 페루, 영국의 작가들 작품이다.

각 나라의 작품엔 나라마다 역사와 풍광이 다르듯, 독특한 개성으로 채워져 있다.

집에서, 한가로이 그 먼 나라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미안할 정도로 고맙다.

그런데 번역에서 걸리는 대목들이 나온다.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작가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어미나 문장의 구성이 너무나 형편없게 써진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작가의 잘못이 아니라 번역자의 잘못이다.

이번에 읽은 여섯 권의 책 중 유독 번역에 문제가 있는 책이 있었다.

그 책엔 오역으로 의심되는 대목이 여럿 나오고, 어느 문장은 오타, 어느 문장은 오자가 나왔다.

오타나 오자는 그럴 수 있다 치자. (그것은 작품의 의미 전달에 치명적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 책은 번역 초고를 그대로 책으로 냈나 의심이 들었을 정도였다.

글이 하나의 책으로 나오자면 고단한 작업을, 그것도 단계적으로 거쳐야 한다.

원고가 출판사로 가면 편집자의 손에서 편집이 되어야 하고, 그 편집된 원고를 다시 작가가 받아 교정을 해야 한다. 교정 작업은 편집자와 작가가 각각 하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체크해서 완성한다.

그런데 그 책은 편집자의 손을 거쳤나, 번역자는 문학적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화가 날 지경이었다.

쉬운 예를 들면, “을 받으러 갔다의 경우, “을 받으러 갔다라고 썼는데, 그게 무려 세 문단에 이어지면서 똑같이 으로 썼다. 오타가 아니라 맞춤법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 편집자가 개입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편집자는 무얼 했나 싶다.

어미도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철수는 허겁지겁 뛰어갔다. 수업시간에 늦었으므로.” 이런 식의 문장이 장편소설 전편에 걸쳐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럴 경우, “철수는 수업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뛰어갔다,”라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번역자는 문학의 기초조차 몰랐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어미는 작가가 어떤 의미를 두고 잘라 쓰는 경우를 제외하곤 정확하게 끝까지 써줘야 한다.

어미야말로 작가들을 은근히 괴롭힌다. ~할 것이다, ~하리라, ~할 터이다,처럼 같은 뜻을 가졌지만 문장의 흐름에 따라 골라 써야 한다. 앞 문장에서 ~할 것이다,로 썼는데 다음 문장에서도 ~할 것이다,로 쓰면 모양새가 빠진다. 특별히 작가가 의미하고자 해서 열댓 문장을 연이어 ~할 것이다,로 쓴다면 몰라도 같은 어미를 연이어 쓰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누가 한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직역을 하려거든 자살하라고 강력하게 말한 이가 있다.

그만큼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번역을 하라는 주문이다.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나라는 번역자를 허접하게 대한다. 우선은 번역료가 낮다. 번역료가 낮은 만큼 질 좋은 번역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러한 점은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원작이 아무리 좋아도 번역이 시원찮으면 그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지 못한 채 단어를 나열하는 꼴이 된다. 어느 작가가 자기 작품이 폄하되길 바라겠는가.

여섯 권의 번역 책을 읽었지만 번역에 백 퍼센트 만족한 작품은 없었다.

그럼에도 번역자에게 감사한다. 번역자가 없다면 그 좋은 작품들을 어찌 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나라의 번역 풍토가 조금이라도 나아지질 바라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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