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한여름.
이 해만큼 더운 해를 기억하지 못하겠다, 고 단언할 만큼 올해는 더웠다.
그래, 더워라.
덥고, 덥고, 덥게, 너를 태우는 것도 이상적이겠지.
더위를, 덥도록 미워하며 한여름 중앙을 버티는 중이었다.
그때 『사랑의 흔적』을, 심영의 소설가이자 교수에게서 받았다.
2014년 아르코 문학 기금을 받아 쓴 작품이다.
나 역시 2014년은 아니지만 여러 번 아르코 문학 기금에 원고를 응모했던 터다.
사실, 나와는 어떻게 다르게 썼기에 기금을 받을 수 있었나 그게 더 궁금했다는 게 솔직한 얘기다.
제목, 사랑의 흔적.
어째 진부하다는 생각이 번뜻 스친다. 헌데 어쩐 일인지 여자가 나오고 남자가 나와 이러쿵저러쿵 연애를 하는 소설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단호하게도 든다. 만약 남녀가 나와 어쩌고저쩌고 사랑하다 헤어져 그 얘기를 썼다면 ‘사랑의 흔적’이라는 제목은 달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진짜 진부하니까. 그렇다면 어떤 사랑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이 흔적으로 나오는지, 은근히 기대가 갔다.
역시, 연애소설을 기대한 독자에겐 실망일 수도 있다.
이 소설엔 연애가 나오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장면은 나오지만, 소설에 언급되었듯, “남자와 여자가 만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조금 더 나아가면 “술까지 마시는 게” 전부다. 연애가 가진 안타까움이라든지, 상대를 향한 마음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연애의 전형이 화끈하게 안 나온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연애가 아닌 것도 아니다.
“영랑의 시로 박사를 받은” “내겐 유일무이한 친구”와 “만해의 시를 연구해 박사를 받은 나” 사이에 그녀가 등장한다. 그녀에 대한 만남과 미련은 “영랑의 시로 박사를 받은” “내겐 유일무이한 친구”와 “만해의 시를 연구해 박사를 받은 나” 가 중첩되어 슬쩍 드러나는가 하면 사라지고, 사라지는가 하면 나타난다. 독자로서는 잘 가던 길에서 멈칫 서야 한다.
그녀에 대한 애정은 사랑이라 말하기엔 버겁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뭣하다.
그녀는 “제자이기도 하고 후배이기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전임에게 선물도 할 줄 아는 시간강사다. 십오 년을 시간강사로 지내는, 전임에게 선물이라는 걸 할 줄 모르는, “만해의 시를 연구해 박사를 받은 나”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다.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몇 번인가 데이트 비슷한 걸 했지만, 그녀는 “우리가 연인 사이는 아니잖아요”라는 말로 관계에 선을 긋는다. ‘나’는 ‘나’가 전임이었다면 그녀가 그렇게 나왔을까 아픔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연애소설이 맞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연애소설이 아니다. 연애는 하나의 장치이고, 핵심은 연애라는 속성을 이용해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모든 소설/글이 그렇지만, 장르를 정하는 순간 그 소설/글은 단순해진다. 이건 추리소설이요, 이건 심리소설이요, 이건 관념소설이요, 그러한 구분은 소설이 가진 여러 버전을,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 그것이 아니면 안 되게끔 만든다. 독자에게도 작가에게도 정말정말 달가운 일이 아니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 많은 삽화와 서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여럿 있다.
“영랑의 시로 박사를 받은, 내게 유일무이한 친구”를 통해, 십오 년째 시간강사를 하는 ‘나’를 통해, 작가는 사학의 비리를 드러내고,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 현실을 고발한다. 그의 고발 내용은 래디컬하나, 서술은 래디컬하지 않다. 거품을 물며 흥분하는 게 아니라, 자근자근 손톱을 물어뜯는 듯이 이어지는 서술 톤으로 인해, 내용은 서술 톤에 용해되어 차분하기까지 하다. 같은 작가 입장에서 볼 때 이렇게 써도 되나, 후환이 두렵지 않나, 그런 생각마저 들기도 하고 한편 부럽기도 하다. 그 중 그래도 보편적이다 싶은 한 장면을 옮기면 이렇다.
“그 역시 나처럼 그리고 무수히 많은 박사들처럼 영랑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그냥 풍문을 모아 짜깁기한 글로, 아니 풍문을 모아 짜깁기한 글들을 모아 박사논문을 썼다.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표절의 고의성은 없는, 다만 문자적 유사성은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창작만 그런 게 아니라 논문은 더더구나 상호 텍스트성의 그물에 참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속에 이미 모방과 영향과 표절을 잉태하고 있는 터였다. 아무려나 인쇄되고 나면 그만이었다. 복사기 회사의 상표를 별명으로 잠깐 조롱의 대상이 됐던 어느 태권도 선수 출신의 박사도 그저 잠깐의 소나기만 피하면 별일이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미 술을 마셨고 돌아갈 차비를 받았다. 다들 그랬다. 온전하게 나의 것은 없었다.”
작가의 이런 대목은, 그리고 소설 전체를 볼 때에도, 다분히 자전적이며 자조적이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 보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문장과 삽화가 글에 대한 신뢰와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이 소설의 서술 방식은 좀 특이하다. 잘 쓰면 성공이요, 못 쓰면 지루해지는 그런 방식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내 눈에는 기껏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내 눈에는 기껏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무릎에 앉아서, 내 눈으로는 기껏 중학생으로밖에 안 보이는 남자아이의 볼을 어루만지다가 둘이 입술을 마주 비비고 있었다.”
소설 전반부에는 거의 이렇게 반복적인 서술 형식인데, 지루하다기 보다 시적 리듬감을 주며 묘한 매력을 준다.
다른 하나는, 지문으로 서술한 끝에, 따옴표도 없이 그 서술 내용에 대한 대사가 바로 나온다. 예를 들면 이렇다.
“건너편 테이블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셋이 앉아서 옛날 팥빙수를 나눠 먹고 있었다. 저 아이들이, 그러니까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서 옛날 팥빙수를 나눠 먹고 있는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셋이 중학생으로 보이냐? 그가 내게 무심한 듯 물었다.” 이런 서술 방식은 그 작가만의 창작이자 개성이다. 이런 방식이 좋아 보여 따라한다면, 그것은 ‘내 소설’이 아니라 아류이며, 방식의 표절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로선 충분히 유혹을 받을 만한 서술 방식이기에 경계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의문을 가진다. 작가는 왜 이런 서술 방식을 택했는가. 삶이란 반복의 반복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나. 현실이 이렇게 흘러가선 안 되는데, 계속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암시인가.
소설은 신문기사가 아니다. 이건 이렇다고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다. 소설은 질문과 고민을 던져야 제대로 된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흔적』은 제대로 된 소설이다.
다시 소설 제목으로 가면, ‘사랑의 흔적’이다. ‘사랑’이고 ‘흔적’인데, 거기에 덧붙이면 ‘애증’이다.
세상을, 사람을, 욕망을, 사랑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그것이 흔적으로 남는다. 5.18 광주항쟁이 그렇고, 세월호가 그렇고, 제주 4.3사건이 그렇고, 해방 후 세운 이승만 정부가 그렇고, 정치와 대학과의 관계가 그렇다. 소설의 중심축으로 나오는 삽화 역시 그렇다.
‘나’는 만해의 시로 박사를 받아 만해마을을 가봐야 할 것 같아 가려고 하나 결국 가지 못한다. 영랑의 시로 박사를 받은 친구 역시 영랑의 생가를 가고자 하나 결국 가지 못한다.
소설은 첫 장부터 만해마을을 가는 것으로 설정하나, 만해마을까지는 너무 멀어 하루로는 부족하고, 그래서 날을 잡아 만해마을을 향해 출발하는데, 가는 도중 이러저러한 일로 소설 마지막까지 가지 못한다. 영랑의 생가를 가는 것 역시 “영랑의 시로 박사를 받은 내겐 유일무이한 친구”가 자살하는 바람에 가지 못한다. ‘나’는 영랑의 시로 박사를 받은 친구의 죽음 이후, 나도 알고 영랑의 시로 박사를 받은 친구도 아는 그녀와 영랑의 생가를 가기로 하나 가지 못한다.
진입을 시도하지만 결코 들어가지 못했던, 들어갈 수 없었던, 카프카의 <성>에는 측량사 K가 나온다. K는 어느 마을에 들어가나 주민들은 K를 믿지 않는다. 이에 K는 ‘나’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말이 쉽지 ‘나’가 누구인지 스스로 증명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이 싸움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지, 살아가야 할지, ‘나’라는 개인은 심문 당한다.
근대성은 개인을 존중하지만, 개인만큼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도 없다.
만해의 시로 박사를 받은, 십오 년 간 시간강사를 하는 ‘나’라는 개인과, 영랑의 시로 박사를 받았으나 그 역시 시간강사로 지내다 그마저 잘린 ‘나’라는 개인은, 만해마을과 영랑의 생가라는 ‘성’을 향하나 K처럼 들어가지 못한다.
다시 소설로 들어가면, ‘나’는 시간강사를 전임으로 하기 위해 부단하게 논문 실적을 올리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총장 면접에서 번번이 탈락한다. 그런데 ‘나’보다 실력도 없고 논문 실적도 없는 시간강사 중 누구는 총장 면접에서 전임이 된다. 학교는 학교에 기여할 수 있는 조건을 내고, 누구는 그 조건이 돈이라는 걸 알고 댄 것이다.
이렇듯 대학은 박사학위를 받은 ‘나’라는 개인보다 자본을 택한다. 대학은 군인들이 들어갔을 때는 시위를 하나, 자본이 들어갔을 때는 조용하다. ‘나’는 이런 자본주의 앞에서 ‘나’를 증명할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이에 작가는 “시장은 이념을 갖지 않는다. 시장은 가격만 알 뿐, 가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말로 자본과 자본에 스스로 잠식되길 자처하는 인간의 군상을 질책한다. 작가가 “만해에는 ‘임’이 없고, 영랑의 생가에는 영랑이 없다”고, 시니컬하게 뱉은 말에는 영혼 없는 자본이 영혼을 지배했음을 환유한다. 그러니 만해의 시로 박사를 받은 나도, 영랑의 시로 박사를 받은 친구도, <성>의 K처럼 만해마을과 영랑의 생가를 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작가는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말로, 그녀의 입을 빌어 “사는 게 도무지 거지 같아요”라는 말로, “우리는 각자의 주어진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감당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로, 생을 버텨가길 바란다.
이 외에도 『사랑의 흔적』에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독자가 무엇을 주제로 삼는가에 따라 소설의 느낌과 각도는 각각 다를 것이다. 그만큼 이 소설엔 여러 버전이 들어있다.
나는 독서의 즐거움을 준 이 작품에, 생에 대한 ‘사랑’을 ‘흔적’으로 쓴 작가에게, 결코 만만치 않을 고통을 느끼며 썼을 그 시간과 정성에, 고마움과 경의를 표한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한 말을 옮긴다.
“작가란 끊임없이 글을 써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면서도 당대의 모순과 부조리에 개입해 들어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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