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유리벙커 2016. 9. 6. 02:00


이상국 시인이 새로 편 달은 아직 그 달이다를 샀다.

그분의 시에는 마음을 달래주는 뭔가가 있다.

그 뭔가가 뭔지 모르지만, 그 뭔가에 기대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음이 어지러웠던 때였다.

 

이상국 시인의 제목들은 대부분 슴슴하다.

이번에 나온 달은 아직 그 달이다역시 탁, 치는 어조는 없다.

하지만 긴 시간 내리 끓여야 제대로 된 곰국이 우러나오듯,

이 시인의 제목 또한 곰국 맛이 들어있다.

이번 시집도, 달은 아직 그 달이라고, 얼핏 들으면 평범한 제목을 달고 있다.

하지만 시인의 이 제목엔 굵직한 의미가 들어있다.

나는 나다!”라는 것처럼 달은 달이다!”로 존재를 확실하게 인정해버린다.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관계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 피차 혈류가 통하는 것으로 봐도 괜찮은 일이다.

이때 하늘의 달시간의 달을 중의적으로 봐도 좋다.

하늘의 달은 모성/모태를 의미하고

시간의 달은 흐름/소통을 의미한다.

 

위안이 필요해 잡은 시집에서 실력도 없이 이렇게 따질 일은 아니나,

일단 내게 들어온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나를 위로했던 시는 <다음 노래>라는 제목으로, 산목련에게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누구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사랑한다고 다 가질 수는 없으니

 

비 오다 그친 아침

 

젖은 몸으로 만난 그대

 

기다려다오

 

내 이 허접한 생을 마치고

 

어느날 밤처럼 스며들어

 

그대와 한 이불을 덮는다면

 

어느 산이 알겠느냐

 


이 시는 연정으로 가득하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연정일 수도 있고, 고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일 수도 있고,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시를 무엇으로 규정하기보다 그저 나로 다 받아들인다. 가슴이 먹먹하고 짠하기가 꼭 나여서이다.

   

 

그런데 이 시인의 시에는 늘 그렇듯, 어머니와 아버지, 고향 마을이 배경을 이룬다. 시인은 바다를 가까이에 두고 살지만, 더 나은 데로 가고자 어머니의 지갑을 털어 야반도주를 한다. 그렇지만 빈털터리로 다시 돌아오고야 만다. 그리하여 시인은 평생을 속초 바닷가 마을에서 시를 지으며 자신에 대한, 혹은 시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품고 산다.

<미시령>이라는 시에는 시인의 그런 마음이 녹아있다. 헌데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에 섞여 허를 찌르는 듯한 유머가 재미를 준다

 

 

영을 넘으면 동해가 보이고

그 바닷가에 나의 옛집이 있다

 

수십년 나는 미시령을 버리고 싶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집을 비우면 바다가 심심할까봐

눈 오는 날에도 산을 넘고 어떤 날은 달밤에도 넘는다

 

서울 같은 건 거저 준대도 못 산다며

한사코 영을 넘는 것이다

 

바다도 더러 울고 싶은 날이 있는데 내가 없으면

그 짐승 같은 슬픔을 누가 거두겠냐며

시키지 않은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동해는 내가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겠냐며

남모르게 곁을 주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바람이나 나무뿌리에 묻어둔 채

영을 넘고는 하는 것이다



<자두>라는 시에는 시인의 학창시절이 나온다. 아마도 시인이 본격적(?)으로 가출하는 사건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인지도 모른다.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알은 척를 안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들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 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것만 먹으면 탈 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이 시를 읽다 보면 한 편의 청소년 드라마 혹은 만화를 보는 듯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찌 시인만 저랬을까. 사연은 다르지만 그 시절의 누구누구들도 시인처럼 저런 시위도 하고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의 그 시절은 가난했지만 지금처럼 악다구니는 없었고, 힘들긴 했으나 상대에게 상처를 줄줄 몰랐다. 그래서 시인이 살았던 그 시절이 곧 우리의 시절로 소환되는 까닭이다.

<금요일>이라는 시 역시 시인의 일상이 우리의 일상으로 스크린 되어 나온다. 사연은 애처로우나 느낌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을 준다. 시인만의 작법이 아닐 수 없다. 

 

 

보통은 금요일 오후에 로또를 산다

 

시가 안되는 날은 몇장 더 산다

 

나는 언젠가 내 밭에서 기른 근대로 국을 끓여먹거나

머잖아 이웃들에게 상당한 관후(寬厚)를 보이게 될 것이다

 

로또는 인류와 동포를 위한 불패의 연대이고

또 그들이 나에게 주는 막대한 연민이다

 

나는 부자가 되면 시 같은 건 안 쓸 작정이다

 

어쩌다 그냥 지나가는 금요일은 불안하다

누군가에게 이 세계를 그냥 줘버리는 것 같아서다

그리고 은밀하게 그것을 맞춰보고는

 

, 나는 당분간 시를 더 써야 하는구나 혹은

, 시도 참 끈질긴 데가 있구나 하며

 

다시 금요일을 기다린다

 

 

뿐만이 아니라 시인은 소외된 자들에 대한 마음도 따뜻하다. 따뜻한 한편, 이렇게 몰아간 국가와 우리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존엄에 대하여>라는 시가 그렇다

 

 

며칠 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미안하지만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문 좀 두드려달라던 작가는 스스로를 버렸다

식은 밥이나 이웃에게도 그랬겠지만

자기가 쓴 시나리오에게도 떳떳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주검을 치우는 사람에게

개의치 마시고 국밥이나 한그릇 자시라며

제 손으로 목숨을 접은 어느 독거노인은

따뜻한 국밥 몇그릇을 세상에 남겼다

가난했지만

죽음에게까지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그 소중한 유산을 남겼던 것이다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주검들이 수줍게 떠올라도

아이들 몇몇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 앳된 나이에 퉁퉁 부은 민낯을

죽어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송파 어디선가 월세 살던 세 모녀가

공과금과 마지막 집세를 계산해놓고

한날한시에 세상을 버린 것도

다시는 볼 일이 없더라도

국가와 집주인에게 당당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뭔가에게 굽히기 싫었던 것이다


 

<슬픔을 찾아서>라는 시는 <존엄에 대하여>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슨 이런 나라가 다 있냐며

이런 나라 사람 아닌 것처럼 겨울 팽목항에 갔더니

 

울음은 모래처럼 목이 쉬어 가라앉고

울지 좋은 자리만 남아서

 

바다는 시퍼렇고 시퍼렇게 언 바다에서

갈매기들이 애들처럼 울고 있었네

 

울다 지친 슬픔은 그만 돌아가자고

집에 가 밥 먹자고 제 이름을 부르다가

 

죽음도 죽음에 대하여 영문을 모르는데

바다가 뭘 알겠나며 치맛자락에 코를 풀고

 

다시는 오지 말자고 어디 울 데가 없어

이 추운 팽목까지 왔겠냐며

 

찢어진 만장들은 실밥만 남아 서로 몸을 묶고는

파도에 뼈를 씻네

 

그래도 남은 슬픔은 나라도 의자도 없이

종일 서서 바다만 바라보네


 

이상국 시인의 시는, 평소 시인의 어법처럼 능청을 떨지만 그 안엔 슬픔과 체온이 들어있다. 뜨거운 것도 아니요 찬 것도 아닌, 딱 사람의 온기로 사람을 부른다. 고형렬 시인이 쓴 발문에는 이상국 시인의 시를 피폭된 시간을 복원하는 그의 시는 동쪽으로 가장 멀리 나가 있는 자의 마음 바닥에까지 닿아있다고 말한다. 이상국 시인의 시가 아릿한 슬픔을 물고 있긴 하나 미소를 짓게 하는 힘은 바로 피폭된 시간을 복원하는 것에 있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라는 제목이 이를 말한다.

나는 시인의 이러한 점을 이상국 시인의 아크타입(原型, archetype)이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