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21 창작 21 2007년 겨울호 |
[ 단편소설┃두 개의 자화상 / 김정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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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단편소설집 <<곁눈질>>에서 <거기, 야적장>이라는 제목으로 수정되어 나왔음. |
거기, 야적장
1
추악한 점령군 하나를 만났다. 그는 이름을 달지 않고 나를 불렀다. 내 이메일로 들어온 그의 이름은 이름이라 할 수도 없는 ㅍㅊㅋ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늠할 수 없는 기호는 가면 속의 얼굴만큼이나 답답했다. ㅍㅊㅋ은 무작위로 날리는 스팸메일을 통해 내 이메일로 들어왔으며, 보통 아르바이트의 다섯 배나 되는 금액을 제시했다. 나는 돈을 벌자고 결심한 터였기에 ㅍㅊㅋ의 제의를 수락했다.
ㅍㅊㅋ이 말하는 아르바이트는 간단했다. 일주일에 한 번 마당을 청소해주는 것이었다. 청소해야 할 마당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순 없었지만 나는 땀 흘려 일하길 원했고 거기다 보수가 좋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하자 ㅍㅊㅋ은 조건을 내걸었다. 청소는 두 시간 내에 마쳐야 하며 설혹 일찍 끝냈다 해도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두 시간 내에 가버리면 보수는 없는 걸로 할 터인데 그래도 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ㅍㅊㅋ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사실 ㅍㅊㅋ이 제시한 조건은 조건이라 할 수도 없었다. 두 시간 내내 청소만 한다고 해도 그랬고 십 분 내에 마친 다음 나머지 시간을 쉬어도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게 중요했고 더불어 돈까지 벌 수 있다는 게 꽤 큰 유혹으로 작용했다. 그랬음에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건 사실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째서 보통 아르바이트의 다섯 배나 되는 보수를 주겠다는 건지 영 개운치 않았다.
나는 ㅍㅊㅋ이 알려준 장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그곳은 ㅍㅊㅋ이 그토록 세세하게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찾아낼 수 없는 곳이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그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도로에서 꽤 떨어져 있는 모텔이었다.
길은 큰길에서 몇 번인가 갈라진 샛길의 샛길이었다. 시골도 아니면서 한참이나 시골 같은, 비포장 길로 접어들었다. 길 양 옆으론 풀들이 무성했고 칠팔백 미터쯤 떨어진 곳엔 철로가 뻗어있었다. 사람이라곤 얼씬도 하지 않는 길을 걸으며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도 좋고 돈도 좋지만 이토록 호젓한 곳엘 무턱대고 간다는 게 꺼림했다. 내가 이럴까 저럴까 하는데 풀숲 저만치로 ㅍㅊㅋ이 말한 모텔이 삐죽이 보였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가보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모텔 주위엔 다른 집들이나 헛간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랄 대로 자란 풀만이 모텔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모텔 입구에 서서 건물 전체를 훑어보았다. 모텔 입구엔 마당이라고 할 만한 공간은 없었고 영업을 중단했는지 사람이 들락거리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수리는커녕 도색조차 하지 않아 금세라도 허물어질 듯한 모텔은 폐가나 다를 바 없었다. 손님은 고사하고 사람조차 살지 않을 것 같은데 어째서 마당을 청소해 달라고 했는지 의아했다. 어쩌면 새로 영업을 시작하기 위해 마당부터 청소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현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모텔은 영업을 하지 않는지 로비엔 그 흔한 벤자민이나 관음죽 화분 하나 없이 썰렁했다. 썰렁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왠지 모를, 침침하면서도 써늘한 감이 실내를 휘돌고 있었다. 나는 하릴없이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두껍게 내려앉은 먼지만 마셨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모를 즈음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벽은 찌들대로 찌들어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그 아래엔 작고 둥근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었다. 테이블 위엔 A4용지 한 장이 보였는데 나는 A4 용지의 글을 읽으며 절로 헛웃음이 났다. 모텔은 비어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지 마시고 뒷마당만 청소해 주십시오. 약속한 대로 두 시간입니다. 일을 끝내도 마당을 벗어나진 마십시오. 이 약속을 지켰을 경우에만 보수를 지불합니다.
웃기는군. 비어있다면서 무슨 감시카메라라도 설치했다는 말이야 뭐야? 아니면 시간을 재는 센서라도 달았다는 말인가? 세상이 각박해도 그렇지 약속을 했으면 믿을 것이지 저만 약속을 지킬 줄 알고 상대방은 지키지 않을 것인 양 다짐에 다짐을 하는 것이 가소로웠다. 더구나 모텔에 있는 물건이라고 해봐야 가져갈 만한 것이라곤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외딴 모텔, 숨어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라 해도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게 솔직히 무서웠다. 나는 무서워지는 나를 헛웃음으로라도 메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서둘러 로비를 나와 건물 뒤로 갔다. 건물 뒤엔 모텔과는 딴판으로 제법 넓은 잔디가 정갈하게 깔려있었다. 순간 나는 모텔을 잊고 신을 벗었다. 맨발로 잔디를 밟자 까슬까슬한 느낌이 정수리를 찔러댔다. 날카로우면서도 묘하게 좋은 현기증이 났다. 맨발로 잔디 끝까지 걸어갔다. 잔디 끝에는 중간 정도 키의 나무들이 강 쪽을 향해 일렬로 서 있었고 나무 아래엔 나무벤치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놓여있었다. 나무와 벤치 바로 아래엔 강으로 내려가는 비탈길도 있었는데 강은 꽤 넓었고 수량도 풍부해보였다. 마당을 청소해야 하는 것도 까맣게 잊고 그 자리에 서서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강물은 숨을 죽이며 조용히 흘렀다. 숨을 죽이며 살아가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볼 수만 있다면 굳이 숨을 죽이며 살 까닭은 없었다.
신을 신고 강과 마주보고 있는, 모텔 건물 모퉁이로 갔다. 파란색 긴 호스가 수도꼭지에 끼워진 채 둥글게 말려있었고 호스 옆엔 누런 고무통 한 개와 거리를 청소할 때 쓰는 연두색 긴 빗자루가 놓여있었다. 호스나 고무통은 언제 썼는지 모르게 바짝 말라 있었고 빗자루 역시 먼지와 비바람으로 바래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잔디 쪽으로 갔다. 청소해야 할 마당이란 잔디를 말했던 듯싶은데 잔디는 청소해야 할 무엇도 없었다. 낙엽이 좀 떨어져 있는 것 말곤 휴지나 빈 깡통도 보이지 않았다. 잔디 위를 쓱쓱 쓸어댔다. 초가을의 햇살이 미끄럼을 타고 이마에 꽂혔다. 송글송글 기분 좋게 땀이 맺혔고 위축되었던 감정은 적잖이 홀가분해졌다. 잔디를 다 쓸고 시계를 봤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남아있었다.
잔디마당 끝에 있는 벤치로 갔다. 나무벤치는 등받이가 없는 것으로 짙은 갈색이 옅은 갈색으로 변해 묵은 정과도 같았다. 나무벤치에 앉아 강 건너 쪽에 있는 산을 보았다. 해는 정오를 향해 자라고 있었고 산은 젊은 해를 받으며 초가을을 키웠다. 마음이 산란해지기 시작했다. 산과 강을 털고 일어났다. 벤치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시계를 봤다. 두 시간을 채우려면 한참이나 더 있어야 했다. 다시 신을 벗고 잔디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중앙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가장자리를 따라 돌기도 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벤치 옆에 딱 하나 놓여있는 평상으로 가 벌렁 누웠다. 하늘은 온통 비어있었다. 나무도 없이, 한줄기 강물도 없이, 하늘은 아무 것도 담지 않은 채 모든 걸 담고 있었다. 모텔을 올려다보았다. 옥상엔 수건이나 빨래 비슷한 것조차 널려있지 않았다. 모텔은 사람도 없이 오전에서 오후로 향해 가는 이 적요하기만 시간을 온통 빨아먹고 있었다. 평상에서 일어나 나무 아래로 갔다. 모텔을 등지고 서서 아래를 보다 시계를 보다 했지만 시간은 요지부동이었다. 고개를 돌려 모텔을 봤다. 사람이 없는 것만은 틀림없는데 어쩐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슬그머니 나무 뒤로 가 몸을 숨긴 채 모텔을 올려다보았다. 죽어있는 듯한 모텔은 흉하게 살아, 초조하게 살아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자꾸만 으슬으슬해지는 나를 용케도 버티고 있었다.
그날 저녁 ㅍㅊㅋ이 나를 찾았다. 청소를 깨끗이 해 줬고 정한 시간을 벗어나지 않아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보수는 다음 주에 오면 테이블 위에 놓겠다고 했다. 두 시간 동안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하는지 참으로 이상했다. 나는 굳이 그럴 게 아니라 통장으로 넣어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내 의견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다음 주에 오면 그때 주겠으니 그리 알라고만 했다. 나는 더는 뭐라 말하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송금할 수 있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터인데 무슨 사정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는 얼굴이나 목소리를 모르면서도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 관계라는 걸 시범적으로 보여주려는지도 몰랐다. 그게 그의 일일 수도 있었다. 어느 회사 어느 단체에서 그런 일감을 주어 그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알아낸 다음 그것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묵비권과도 같은 ㅍㅊㅋ의 태도가 언짢았지만 내버려두었다. 누가 어떤 연구를 하든 말든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중요했다. 생각은 그랬지만 한편으론 다음 주에 다시 갈 수 있을까 하는 반문이 들었다. 밤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아무도 살지 않는 모텔을 기웃거려야만 한다는 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가든 안 가든 나는 그날 그때 가서 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미루고 나니 만약 가지 않는다면 오늘 일한 대가는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고 적은 돈이지만 꼬박꼬박 저축을 했다. 이제 돈은 내게 현실이었으며 가능성이었다. 당장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차표이자 과거가 아닌 현재를 원할 수도, 원해도 되는 자유였다. 나를 굳건히 지탱해 줄 돈을, 그것도 땀 흘려 번 돈을 포기하긴 싫었다.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 누웠다. 푼푼이 모은 돈을 어림해보니 일 년 정도만 더 모으면 그럭저럭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가고 싶은 곳을 그려보았다. 유혈이 낭자한 화산과 바람이 매장된 빙하의 극점이 보였다. 인간이길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심해로 훨훨 날아가는 나도 보였다. 나는 잔해로 남은 그 시절이 더는 쫓아올 수 없는 곳에 가서, 깊이 숨을 쉬며 야만의 시간들을 버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어찌됐든 돈은 벌어야 했다.
2
모텔 로비 안은 처음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죽은 듯이 가라앉아 있었다. 누가 다녀간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았고 환기되지 못한 공기만이 무겁게 깔려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작고 둥근 테이블 위에 놓인 돈 봉투였다. 돈 봉투를 가방에 넣고 테이블에서 몸을 틀었다. 한 발짝을 막 뗀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내가 선 지점에서 불과 일 미터 정도 떨어진 벽엔 그림 한 장이 붙어있었다. 지난주엔 분명 보지 못하던 그림이었다. 그림과 담을 쌓고 산 게 몇 년 됐다곤 하지만 있던 그림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사절 크기의 그림은 틀림없이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림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옆의 벽에 붙어있었는데 높이로 치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내 시선과 딱 마주치는 곳이었다. 테이블이 놓인 자리에서 보면 비스듬히 엇갈린 곳이었는데 거리로 쳐도 바로 앞이었다. 그렇게 가깝고도 어색한 자리에 걸린 그림은 보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보게끔 되어 있는데 보지 못하고 스쳤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누가 이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자리에다 그림을 붙여놓았는지, 그렇다면 누군가가 산다는 말이 되는데 그가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어쩌면 ㅍㅊㅋ이 봉투를 놓고 가면서 붙여놓았을지도 몰랐다. 정지된 모텔을 하나씩 회복시켜 다시 영업을 하려고 마당을 청소시키고 그림을 붙여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런 어정쩡한 자리에다 붙여놓았으며, 그것도 액자가 아닌 스케치북을 있는 그대로 찢어 붙여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림은 인물화였다. 어쩌면 자화상일지도 모르는 초상화는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연필드로잉이었다. 그림은 벽에 붙어있다기보다 커다란 못에 박혀있었는데, 못이 이마 한 가운데를 뚫고 있었다. 그래 그런지 그림 속의 얼굴은 현상수배범처럼 보였다. 그림 앞으로 바짝 다가가 음울해 보이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은 배경도 여백도 없이 이마, 눈, 코, 입만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연필의 터치를 살폈다. 조금 거칠다 싶었지만 개성이 강해보였다. 나는 그림에서 조금 떨어져서 보다 가까이에서 보다 했다. 그림 속의 인물은 머리칼과 귀, 턱이 그려있지 않아 뭐라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어쩐지 내게 낯익은 느낌을 주었다. 그림을 보다 말고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그림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그림이 나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급히 로비를 나와 뒷마당으로 갔다. 지난주에 했던 것처럼 잔디가 깔린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잔디 위엔 지난번보다 낙엽이 조금 더 떨어져 있는 것 말곤 다른 변화는 없었다. 나는 나무도 해도 바람도 보지 않고 그저 잔디만 내려다보며 쓸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림 속의 현상수배범과도 같은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듯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그 시선을 억지로 무시하면서 비질을 마쳤다. 시간은 역시 남아돌았다. 나는 한 시간 이상 남는 시간을 그대로 견딜 것인지 아니면 돈을 마다하고 그냥 가버릴 것인지 정하지 못했다. 지난번에 앉았던 벤치로 가 앉았다. 속은 여울지듯 하는데 가을햇살은 초연하게 내리쪼였다. 잠깐인데도 가을햇살은 여름 햇살만큼이나 뜨거웠다. 온몸으로 햇빛을 받고 있자니 한여름의 더위만큼이나 뜨거움이 치받았다.
내 마음이 한여름이었을 때,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모욕했고 퇴로마저 끊어버렸다. 나는 끝내 그의 집으로 가 그를 불러냈다. 그는 반바지에 홑겹 점퍼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나와 집 앞 계단에 앉았다. 그에게서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단절의 바람, 나는 그 바람을 쐬며 그의 얼굴을 돌려 나를 보게 했다. 그는 뭘 원하는지 묻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의 얼굴을 놓았다. 그가 밤하늘로 눈을 돌렸다. 나는 몇 계단 아래로 내려가 앉았다. 계단 옆에 심어져 있던 샐비어가 별이 쏟아내는 빛을 맞으며 떨고 있었다. 나는 샐비어의 목을 꺾어 붉디붉은 비늘을 하나씩 떼어가며 물었다. 기어이 그렇게 하겠다는 거니?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또 하나의 샐비어 목을 끊으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대답 대신 계단을 내려와 내 옆에 앉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마귀 한 마리가 샐비어 줄기 끝에 죽은 듯 엎어져 있었다. 나는 사마귀를 덥석 잡아 그와 나 사이에 놓고 핸드백을 얹었다. 사마귀가 핸드백의 무게에 눌려 죽길 바라며 핸드백을 지그시 눌렀다. 그는 이런 나를 빤히 쳐다봤다. 핸드백을 치우고 눌려 죽은 사마귀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납작하게 죽은 사마귀를 받아들더니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나를 보며 사마귀를 씹어 먹는 그의 눈엔 냉소가 굳은 석고처럼 들어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앉아 그 사마귀가 암놈일 것인지 수놈일 것인지 물었다. 그는 암놈이든 수놈이든 네가 원하는 놈이 아니겠냐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를 쏘아보기만 했다. 내 눈엔 어느 새 타들어갈 듯한 눈물이 맺혔다. 그는 사마귀를 먹어준 일이 너한테 해주는 마지막 선의가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멈출 수 없이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어째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이제 막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때였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갑자기 떠나겠다는 결정은 나를 떠나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아무 계획도 없이 막연히 어딘가로 떠나겠다는 말은 한마디로 무모한 짓이었다. 그가 없는 텅 빈 작업실. 그의 벗은 몸을 그리던 그 때의 나는, 나의 벗은 몸을 그리던 그 때의 그는, 한때의 열띤 허상에 불과했다. 핏발 서게 서로를 탐닉했던 눈길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고, 나는 출입구도 비상구도 없는 막다른 곳에서 헐떡일 따름이었다.
후르르 몸을 털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강물 위로 제법 큰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천천히 날았다. 쫓김도 쫓아감도 없이 새는 그렇게 혼자 날개를 저었다. 나는 새를 보며 재빨리 스케치를 했다. 스케치를 하다말고 문득 멈췄다. 그가 질타했던 그 그림들이 여태도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초상화를 대못으로 쾅쾅 박아놓은 자 역시 내가 그렸던 그런 그림의 어디쯤엔가 속할지도 몰랐다. 강을 보다말고 모텔을 올려다봤다. 모텔 건물의 유리창은 까만색이 섞인 짙은 갈색으로 안에선 밖이 보이고 밖에선 안이 안 보이는 그런 유리창이었다.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유리창은 하나같이 강을 향해 있었다. 모텔에서 강을 바라보는 눈, 어두운 유리창을 통해 나를 보는 눈, 빈 모텔에서 누가 강을 볼 것이며 나를 볼 것인가. 새삼 모텔 유리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둡기만 한 유리창엔 사람은커녕 구름조차 얼비쳐있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렸다. 돌리는 순간 무엇인가가 유리창 안에서 어른거렸다. 나는 어른거리는 게 무엇인지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얼른 시계를 봤다. 약속한 두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나는 선뜻해진 마음을 추스르며 달리다시피 모텔을 빠져나왔다.
3
그날 밤 이메일을 뒤져보았으나 ㅍㅊㅋ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모텔에 누가 살고 있느냐는 내용을 ㅍㅊㅋ에게 보냈다. 며칠이 지나도록 ㅍㅊㅋ에게선 답이 오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수신을 체크해 보았다. ㅍㅊㅋ은 내가 이메일을 보낸 직후에 본 것으로 나와 있었다. 기분이 좀 상했지만 이내 접었다.
자리에 누워 다리를 벽에다 올려 세웠다. 뻐근했던 다리가 자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통장의 돈을 짚어봤다. 숫자는 분명 늘었지만 는 만큼 기쁘거나 들뜨진 않았다. 내가 원했던 자유가 통장에 차곡차곡 탑을 쌓고 있건만 어째서 이렇게 허전하기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리를 내리고 오른 쪽 뺨과 목, 젖가슴, 팔뚝과 다리에 모공소독제 발랐다. 피부는 그때의 상처를 말해주듯 여전히 쭈글쭈글 했다. 나는 일그러진 살에다 베이비오일을 바른 후 아르바이트 정보가 빼곡히 들어있는 A4용지를 집어 들었다. 형광펜으로 줄이 쳐진 아르바이트엔 호프집 홀 서빙과 피시방 아르바이트, 꽃 배달이나 서류배달 혹은 빵집 아르바이트가 들어있었다. 아르바이트는 선택의 자유가 있어 좋긴 했지만 고정적이지 않아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약간의 고정적인 아르바이트라면 만화를 그려 보내는 일이었다. 그 일은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 보수도 좋은 편이라 그럭저럭 생활비는 충당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정식 직장보다 아르바이트가 좋았다. 언제든 때려치울 수 있다는 그 홀가분함이 내겐 중요했다. 나는 홀가분해졌다. 그림에서도 놓여났고, 그에게서도 풀려났다. 이제 나는 아귀아귀 돈을 버는 그 순간을 즐길 줄도 알았다. 나는 불모지와 다를 바 없던 그 자리를 잊었다. 아, 그러나 나는 잊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미술대상공모전에 같이 작품을 내보자고 제안했었다. 그는 올해는 쉬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러면 내 모델이 되어주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공모전에 낼 작품을 위한 것이냐고 했다. 나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잘 되면 그래볼까 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어떤 걸 구상하는지 물었다. 나는 누드화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왕이면 너도 나를 그리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가 옷을 벗고 나도 옷을 벗었다. 그가 이젤 앞에 앉아 나를 보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다. 나는 연필을 쥔 채 그를 보았다. 그의 다리는 탄탄했고 팔의 선은 향기로웠다. 이젤 앞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의 뒤로 가 등에 볼을 댔다. 그가 몸을 돌려 내 허리를 안았다. 나는 그의 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그가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는 나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나를 주고 싶었다. 굶주림처럼 늘 헐벗고 있기만 한 그에게, 나는 그의 전부가 되도록 나를 아낌없이 주고 싶었다. 그가 나를 떼 내더니 다시 이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한쪽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은 자세로 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를 그리고 있는 그는 쓸쓸해 보였고 나는 그런 그를 가슴 뭉클하니 화폭 가득 채웠다.
나는 그가 들어있는 누드화를 그의 이름으로 미술대상공모전에 냈다. 그의 그림이 된 내 그림은 입선을 먹었다. 나는 그에게 누드화를 미술대상공모전에 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하늘이 파랗게 열리고 숨결마저 파랗게 물이 드는 날이었다. 그는 작업실 간이침대에 누워, 들어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그의 곁에 앉아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선 소식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그러나 내가 아니라 네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한동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그를 잡아 일으키며 축하주라도 사야 할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창가로 가더니 밖을 내다보기만 했다. 나는 그의 뒤로 가 축하한다고 말하며 그의 허리를 안았다. 그가 돌연 몸을 돌리더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물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찌를 듯한 파란 하늘보다 더 파랬다. 나는 내가 곧 너인데 누구 이름으로 당선이 되던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다. 그가 내 어깨를 움켜잡더니, 언제까지 나를 가지고 놀 셈이냐고 했다. 그가 나를 떠다밀 듯이 놓더니 작업실을 나갔다. 나는 나가는 그를 잡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가 나를 싸늘하게 쳐다보더니, 그래서 겨우 생각해 낸다는 게 툭하면 내 이름으로 출품하는 거냐고 했다.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으며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가 나를 노려보며 침을 뱉듯이 말했다. 그림과 네 욕망을 혼동하지 마라.
그와 내가 누렸던 관계는 빠르게 좌초했다. 나는 생각지도 않던 그 낯선 시간의 중심에서 비틀거렸다. 나는 폐막이었으며 배역을 빼앗겼으며 혼자가 되었다. 홀로 절망에 갇힌 나는 어디로 가야했을까. 어디로 가서 이 사랑을 사랑으로 표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작업실에 나오지 않았다. 그가 두고 간 이젤과 작업복이 작업실 한쪽에서 나뒹굴었다. 나는 그의 작업복을 입고 그의 이젤 앞에 앉았다. 연필을 잡고 그를 그리려 하자 막막함이 가슴을 조여 댔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이토록 소식이 없는 것일까.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모텔에다 그림을 붙여놓았던 자 역시 어쩌면 나와 같은 자리를 떠안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담담히 웃을 수 없어 그런 식으로 자신을 은폐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게 누구이든 그는 연필의 부드러운 감촉을 탔을 터였다. 점 하나로 시작한 선은 무한한 세계를 향해 파동을 일으켰을 것이고, 유연한 떨림과 말로 말을 할 수 없음과 느낌으로 느낄 수 없는 무수한 질들이, 흑연의 깊고 감미로운 색으로 번져갔을 것이었다. 그리운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얼굴을 베개에다 묻고 빨리 내일이 오길, 일에 묻힐 수 있는 내일이 오길, 간절히 바랬다.
비포장 소로 양 옆엔 풀들이 웃자란 채 뒤엉켜있었고 풀들에게선 벌써 가을 냄새가 났다. 나는 억세진 풀들을 손으로 쓱쓱 훑기도 하고 훑은 풀을 코에 대기도 하면서 걸었다. 내가 걸어가는 정면엔 아침 해가 자락을 펼쳤고 감나무엔 감이 찢어지게 매달려 있었다.
모텔로 들어가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작은 테이블 위엔 봉투가 놓여있었다. 나는 돈이 든 봉투를 집어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메고 돌아서려는 순간 문득 그림 생각이 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 계단 옆 벽을 보았다. 벽엔 지난번 것과는 다른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스케치북을 찢은 채 이마에 대못을 박고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이번 그림에는 머리칼도 턱도 귀도 있었다. 나는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림 속의 인물은 여자라거나 남자라고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얼굴이었다. 굳이 말하면, 어떻게 보면 여자이고 어떻게 보면 남자였다. 성이 불분명한 인물화는 우물만큼이나 움푹 팬 볼에 긴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었다. 턱은 예리한 정과도 같았고 눈은 매의 발톱과도 같았는데 마치 나를 쏘아보듯 일직선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러나 본 적이 없는 얼굴은 화살 같은 시선으로 곧장 나를 겨냥했다. 목표를 향한 시선은 정확했고 눈에서 나오는 빛은 견딜 수 없이 나를 짓눌렀다.
급히 로비를 나와 뒷마당 잔디로 갔다. 그림의 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나는 상에 떠밀려 허둥허둥 비질만 해댔다. 비질을 하는 내내 나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섬뜩하고도 날이 선 시선을 느꼈다. 훔쳐보는 눈, 지켜보며 관찰하는 눈, 보이지 않으나 보고 있는 눈. 그런 눈이 야비하게 내 뒷목을 눌렀다. 나는 비를 잔디에다 팽개치고 모텔 창을 올려다보았다. 창에선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 뻣뻣한 걸음걸이로 나무 아래로 가 섰다.
강 저쪽에서 군인들이 도하훈련을 준비하느라 부교를 놓고 있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군인이 지휘봉을 들고 반쯤 만든 부교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사병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한 소대로 보이는 사병들이 옆에 세워둔 군용트럭에서 드럼통을 내리기도 하고 부교를 고정시키기도 했다. 군용트럭 옆엔 탱크도 한 대 있었고 사병 하나가 탱크 위로 올라갔다. 강 건너에서 보는 탱크나 군용트럭, 얼룩무늬 군복은 전쟁도 훈련도 아닌 한 폭의 그림이었다. 군인들이 강을 가로질러 부교를 놓았다. 물길은 부교가 낸 길과는 방향도 다르게 흘렀다. 그림과는 방향도 다르게 흘러버린 나는 지금 엉뚱한 곳을 내 집인 양 서서 평화롭게까지 보이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도 누군가의 눈에는 한 폭의 그림일 터였다. 한가로운 그림이 되어 있을 나, 그런 나를 보고 있을 눈.
고개를 돌려 모텔 유리창을 올려다보았다. 삼층 맨 가장자리 방의 짙은 유리창 안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나는 얼어붙은 채 유리창 안의 움직임에 눈을 꽂았다. 유리창 안에선 시계추의 움직임과도 같은 움직임이 반복되었다. 손짓 같기도 하고 몸짓 같기도 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눈을 돌려 강 쪽 하늘을 보았다. 새도 구름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모텔 유리창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창엔 이상한 움직임은 물론 새의 움직임이나 구름의 움직임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내가 보았다고 본 움직임은 누군가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이 만들어낸 착시현상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조급하게, 그러나 전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잔디를 밟고 나왔다. 비포장 소로를 걸으며 자꾸만 뒤를 흘깃거렸다. 손짓 같기도 하고 몸짓 같기도 한 움직임은 감시의 시선이 아니라 구조를 요청하는 몸짓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비포장 소로를 벗어나 차가 다니는 도로까지 나왔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도로를 따라 무작정 일 킬로쯤 걷자 구멍가게가 나왔다. 구멍가게로 들어가 모텔에 사람이 사는지 물었다. 구멍가게를 지키고 있던 할머니는 모텔이라는 말조차 금시초문인지 그런 건 모른다고 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한동안 구멍가게 앞에 서 있었지만 이따금 차들만 오갈 뿐 사람은 볼 수 없었다.
4
나는 ㅍㅊㅋ에게 모텔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는 이메일을 띄웠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던 곳에선 갈 때마다 그림이 바뀌었고 뭔가 알 수 없는 움직임이 잡혔다. 상상력을 좋게 발휘하면, ㅍㅊㅋ은 퍼포먼스를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인간의 공포감이 어떤 것인지, 어느 대상과 환경에 따라 어떻게 반응하는지, 행위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빈 공간이라고 제시한 다음 비어있지 않음을 은연중 흘렸을 때, 그 사실을 느끼는 자가 보이는 행동과 변화는 충분히 퍼포먼스로 해 볼만 했다. 그래서 ㅍㅊㅋ은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 높은 액수를, 그것도 후불제로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ㅍㅊㅋ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별렀다.
이메일을 보낸 후 하루가 멀다하고 답을 기다렸지만 ㅍㅊㅋ에게선 답이 없었다. 물론 수신체크에는 메일을 보낸 직후에 본 걸로 나와 있었다. 나는 모텔을 가기 전날 밤, 똑같은 메일을 ㅍㅊㅋ에게 보냈다. ㅍㅊㅋ은 금세 답을 보내왔다. 사람은 살지 않으며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답을 받으니 마음이 놓였다. 거기다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답보다 더 확실한 답이었다. 나는 모텔로 가기로 결정했다.
비포장 소로엔 밀짚모자를 쓴 중년의 남자가 바퀴가 세 개 달린 수레를 밀고 오고 있었다. 수레엔 잡풀이 잔뜩 실려 있었는데 사료로 쓰려는 듯했다. 남자는 내 옆을 지나가면서 내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나는 몇 걸음 가다말고 남자 뒤를 쫓아갔다. 남자가 의혹에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모텔을 가리키며 혹시 사람이 사는지 물었다. 남자는 잘 모르겠다는 말만 던지더니 무뚝뚝하게 돌아섰다. 나는 계속 남자를 쫓아가며 모텔에서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남자는 모텔에 다닌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퉁명스레 답했다.
남자를 포기하고 모텔로 갔다. 모텔 로비엔 변함없이 돈 봉투와 새로운 그림이 붙어있었다. 그림 앞으로 갔다. 이번에도 그림 속의 인물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얼굴이었다. 그렇게 모호한 얼굴이었지만 표정만은 원망과 부르짖음에 타들어갔다. 입술은 비틀려 턱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고 머리칼은 없었다. 온몸이 가시로 뭉쳐있는 성게와도 같은, 아니면 상상 속의 우주인처럼, 민머리엔 머리칼 대신 안테나 같은 뿔이 빈틈없이 꽂혀있었다. 꽂혀있다기보다 솟아있다는 말이 맞았다. 분노로 이글이글 삐죽삐죽 솟아있는 그 그림 앞에서 나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그림은 어디선가 본 듯한, 어쩌면 만나봤을 수도 있는 그런 생생함이 들어 있었다. 지난번 그림이나 지금의 그림도 보기에 따라선 만화에 나오는 무사나 그와 비슷한 캐릭터로도 볼 수 있었다. 편하게 보자면 판타지를 품고 있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흔하다면 흔한 그런 이미지였다. 그러나 초상화는 너무나 꽉 짜여져 있었다. 만화나 판타지에서 볼 수 없는 어떤 절대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더는 일그러질 수 없는 얼굴과 곡선도 없이 그저 비틀린 입술로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분위기가 그랬다.
나는 자해와도 같은 그 그림에 진저리를 치며 돌아섰다. 누가 그렸는지는 몰라도 그린 자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매주 그림을 바꾸어 거는 자가 그림을 그리는 자와 동일인인지는 모르지만 그, 혹은 그들은 기괴한 농담을 즐기듯 익명의 그림으로 자신을 소통시키고 있었다. 청소는 빌미에 불과했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챘어야 했다.
뒷마당으로 나와서도 청소는 하지 않았다. 신을 벗고 잔디 여기저기를 걷다 모텔 삼층을 올려다보았다. 손짓인지 몸짓인지 모를 움직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음에도 나는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소름끼치게 느꼈다. 나는 잔디 복판으로 가 강 쪽이 아닌 모텔 삼층을 향해 비스듬히 누웠다.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에 누운 비너스>에 나오는 모델처럼, 나는 오른쪽 팔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운 자세를 취했다. 눈에 뜨이기를 거부하는 화가는, ㅍㅊㅋ과도 같이 불투명하기 짝이 없는 화가는, <거울 앞에 누운 비너스>로 나를 그리고 있을 터였다. 4B연필을 집어 들고 흑연의 속살을 느끼며 순간을 잡기 위해 종이 위를 빠르게 달릴 것이었다. 갑자기 속 어디선가 흐느낌 같기도 한, 울컹울컹 한 것이 올라왔다.
나는 <거울 앞에 누운 비너스>를 버리고 강 쪽으로 돌아앉았다. 강을 낀 철길 저 쪽에서 화차가 지나갔다. 화차는 시멘트를 운송하는 차로 회색의 둥그런 탱크를 줄줄이 달고 갔다. 그림책에 나오는 긴 애벌레처럼 시각을 미화시키며 화폭을 손짓했다. 내 캔버스를 장식하던 것들도 저 화차처럼 아무 의심 없이 마음 놓고 아껴도 될 것들이었다. 내 그림은 절뚝이지도 않았고 아슬아슬하지도 않았다. 위험한 여백 같은 건 일 제곱평방미터도 없었으며 평화를 상징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평화는 가슴에 차오르지 않았다. 잃어버린 사랑은 허물어진 나를 일으켜 세워주지도 않았고 극도의 우울과 한없는 침묵만을 던져주었다.
화차는 시야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울컥대던 가슴은 진정되기는커녕 더 울컥댔다. 강에서 돌아서 삼층 유리창을 빤히 올려다봤다. 그날의 내가 느꼈던 그 막다른 문이 나를 잡아챘다. 나는 정신없이 모텔을 빠져 나오며 기어이 그날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그날 그 밤은 동이 트지 않았다. 밤은 쳇바퀴 돌듯 영원히 돌기만할 뿐 내게 그림다운 그림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낙후된 집을 보듯 내가 그린 풍경화를 보며 이제 자신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나타난 그를 보면서도 웃지 못했다. 그림을 뺀 그는 생각할 수도 없었고, 사랑을 배제한 그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가 있었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그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지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는 회화 쪽이 아니라 아상블라주를 택했다고 했다. 그가 택한 널빤지와 아크릴은 자극과 쇼크, 변화와 변용을 수용했다는 말이자 곧 나를 떠났다는 말이었다. 이제 그는 나를 완벽하게 버렸다. 그리움이나 아쉬움, 미련 같은 것은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 그는 자기만의 세계을 찾아 가버렸다.
내 세계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없는 그림은 그저 그런 붓질에 불과할 뿐 에너지도 울림도 없었다. 나는 서로의 누드화를 그리던 때를 생각하며 같이 대형판화를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직도 누군가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고 대꾸했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네가 너를 모르면 누가 알겠느냐고 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건 아직도 너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비웃음이 꾸역꾸역 올라오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네 입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그 말, 참 듣기 거북하다. 아직도 모르겠냐? 너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했어. 내 이름으로 출품했다 해서 내 그림이 될 수 없다는 걸 내가 모르겠냐 네가 모르겠냐. 넌 네 이름으로 출품해서 떨어지면 그런 너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야. 사랑이라는 만병통치약으로, 그 방패로, 불안에 떠는 너 자신을, 너는 간음한 거지. 자기애만한 사랑이 어디 있겠냐. 그 살인적인 자기애 말이다.
나는 부르르 떨며 간이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이별주나 마시자며 가지고 온 술병을 꺼냈다. 나는 그가 비닐봉지에서 꺼내는 소주병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종이컵에다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그와 나는 물감통을 앞에 두고 술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와 나눈 이별주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휘청거리는 몸으로 내가 그린 풍경화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내 풍경화에다 술을 끼얹으며 말했다. 이게 그림이냐? 너 참 잔인하다. 이따위로 그리면 내가 네 곁에 있어줄 줄 알았냐? 그는 종이컵을 집어던지더니 까만색 물감을 짜 풍경화에다 마구 문대기 시작했다. 내 그림은 색을 잃고 까맣게 죽어갔다. 나는 비틀대며 일어나 까만색 물감을 집어 그의 입술에 대고 문댔다. 그가 까만 입술로 킬킬대며 말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살 테니 너도 네 이름으로 살아라.
까만색으로 도배를 한 나와 그에겐 새벽이 오지 않았다.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나는 술에 취할 대로 취한 눈으로 까만색 풍경화를 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도 내게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까만색 풍경화에다 불을 붙였다. 캔버스는 기름을 튀며 불꽃을 날렸고 그를 필요로 하던 풍경화는 말없이 타들어갔다. 나는 내장이 다 쏟아질 것 같은 멀미를 느끼며 불타는 그림 위에 엎어졌다. 불꽃이 타닥타닥 나를 집어삼켰다. 끝, 세상은 끝이었다.
생각에 잠겼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끝이었던 이후 나는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은 채 그곳을 떠났다. 헌데 나를 까뒤집어놓기로 작정한 듯한 그 초상화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ㅍㅊㅋ에게 이메일을 띄웠다. 너는 누구니. 누기이기에 나를 부르니. 내가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답이 왔다. 나는 답을 열다말고 되돌아온 이메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ㅍㅊㅋ은 내 이메일주소에다 수신거부를 걸어놓은 게 틀림없었다. 추악한 정복자.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이 불투명한 기호는 어느 새 일방통행으로 나를 지휘했다. 나는 이 가상공간의 조종자를 찾아 헐떡헐떡 집을 나섰다.
5
오전만 해도 청명했던 하늘은 무겁게 흐려져 있었고 비라도 뿌릴 듯 바람마저 차갑게 불었다. 모텔로 난 소로로 접어들자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앞섶을 여미며 잡풀로 우거진 소로를 달렸다. 바로 앞에 모텔이 보이자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모텔을 쳐다보았다. 모텔은 괴기영화에서보다 한층 더 으스스했다. 모텔 삼층을 올려다보았지만 앞쪽에는 창이 없어서 그런지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점점 어둠을 먹고 있는 모텔은 어둠보다 더한 눈으로 나를 옥죄었다.
성큼성큼 모텔로 들어갔다. 사람의 기척이나 빛이라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어둠에 눈이 익길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전기 스위치가 보였다. 스위치를 올리자 로비는 간신히 부연 빛으로 실내를 밝혔다. 나는 대뜸 그림이 걸린 곳으로 가보았다. 벽엔 오전에 보았던 그림과는 다른 그림이 붙어있었다. 그림 속의 사람은 점에 가까울 만큼 아주 작았다. 사람이 작았다기보다 화폭을 거의 다 차지한 벌레 한 마리가 사람보다 컸다. 벌레는 커다란 사마귀였다. 그림의 사람은 엄청나게 큰 사마귀를 입에 문 채 갈기갈기 찢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와들와들 떨며 까만 동자에 눈을 맞췄다. 흑점은 냉동된 열망과 연소되지 못한 사랑으로 이글거렸다.
그림을 뜯어 들고 겅중겅중 이층 계단을 밟았다. 계단 옆의 낡은 창이 바람에 덜컹댔다. 숨을 몰아쉬며 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앞까지 갔다. 계단 중간 한 가운데엔 출입금지라고 쓴 종이 팻말이 놓여있었다. 종이 팻말은 네모난 백지가 아니라 까맣게 입술을 그려 오려 낸 것이었다. 커다랗고 까만색 입술 복판엔 출입금지라는 글자가 써있었는데, 마치 까만색 입술이 출입금지라는 글자를 물고 있는 듯했다. 금지판을 들고 삼층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삼층 복도 맨 끝의 방 앞에 섰을 때 나는 열기인지 한기인지 모를 것에 부들부들 떨며 털썩 주저앉았다. 방안에 들어있을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무엇이, 과연 어떤 것인지 숨이 막혔다. 눈을 감았다. 저 먼 어디에선가 끄악끄악 목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닫힌 방 안에서 나는 듯도 했고 감은 내 눈 속에서 나는 듯도 했다. 방문에 귀를 댔다. 끄악끄악 소리가 간헐적으로 났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그 소리가 애절하게 나를 불렀다. 나는 왈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의 넓이였지만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명은 어두컴컴했으며 무엇부터 봐야할지 모를 정도로 방안은 여러 개의 이젤과 종이 더미로 난장판이었다. 나는 방안에 들어섰으나 들어서지 않은 자세로 우두커니 섰다. 세상을 등졌으나 등지지 않은 폭력자 하나를 찾아 달려왔지만 내 앞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사마귀가 든 초상화와 까만색 입술을 구겨 아무데나 던졌다. 장애물을 넘어가듯 널려있는 물건들을 밟거나 피해가며 이젤 앞으로 갔다. 이젤 위엔 스케치북이 놓여있었고 스케치북 위엔 반쪽 밖에 없는,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얼굴이 뎅그렁 철로 위에 누워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레일이 부릅뜬 눈이며 얼굴 위로 얼기설기 그어져 있었다. 철길에 치인 반쪽의 얼굴은 칼로 북북 그은 듯한 터치였으며 온통 갈가마귀의 울음소리로 그득했다.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저 인간, 낮은 목소리조차 내지 못해 의문의 부호로 나를 부른 저 인간.
나는 그림을 보다 말고 주변을 둘러봤다. 노트북과 모공소독제와 베이비오일, 돈 봉투와 수십 장 넘게 보이는 <거울 앞에 누운 비너스>와 등을 돌리고 앉거나 잔디 위를 걷는 여자, 강을 바라보거나 잔디를 쓰는 여자의 그림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있었다. 나는 금세라도 질식할 것만 같아 창을 열었다. 두꺼운 바람이 난폭하게 얼굴을 후려쳤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맞은편에 전신거울이 보였고 거울 안엔 일그러진 몸체 하나가 들어있었다. 나는 자화상들이 뒹구는 속에서 신문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거울 속의 몸체를 응시하며 매끄럽다고 할 수 없는 윤곽을 신문지 위에다 그리기 시작했다. 나풀거리는 나, 페르몬을 가득 담은 나, 아기를 안고 있는 그윽한 성모의 나, 대신 화농이 질질 흐르는 내가 드러났다. 나는 열기로 엉겨 붙은 내 오른쪽 뺨에다 그의 오른쪽 뺨을 그려 넣었다. 그의 뺨이 되어버린 내 뺨에선 안쓰러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스팸메일과도 같은 자화상을 휙 날렸다. 나인지 그인지 모를 얼굴이 너불너불 침대 위로 떨어졌다. 화상으로 찌그러진 내 몸에서 함몰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부비트랩을 칭칭 감고 자폭하는 자와도 같이 징그럽고 또 징그러운 그림을 향해 엎어졌다. 신문지의 자화상이 내 몸에 눌려 와작거렸다. 차디찬 몸을 신문지의 자화상에다 비벼댔다. 열상으로 막혀버린 점막과 폐쇄된 표면을 뚫고, 살점과 핏줄마저 파먹으려 나는 미친 듯이 자화상을 파고들었다. 끄악끄악,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어디에선가 났다. ㅍㅊㅋ의 말대로 이곳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사람도 짐승도 아닌 괴물 하나가 괴물로 울부짖을 따름이었다.
나는 부스스 일어나 신문지의 자화상을 들고 아래층 로비로 내려갔다. 계단인지 복도인지 모를 곳에서 또 한 번 끄악끄악 소리가 났다. 추악한 점령군 하나가 흡충이 되어 신음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깊이 들이마시며 그림을 못질했다. 그림 그 어디에선가 끄악끄악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