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발표한 글

이사, 하기

유리벙커 2011. 6. 7. 15:39

 

                                                                         이사, 하기



                                                                        

5년 만에 이사다.

이사하기 전부터 막막해진다.

붙박이장이며 수납장에 콕콕 들어 찬 저 많은 살림을 대체 무슨 수로 정리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포장이사라 해도 버릴 건 버려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공연히 집을 팔았나 슬그머니 후회도 든다.

중도금까지 치른 상태지만 지금에라도 계약을 물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사하기 열흘 전, 포장이사를 계약한다.

그리고 수납장부터 열어본다. 으아.... 이게 다 뭐람. 

수납장을 닫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들쑤신다. 

 

이삿날이 코앞이다.

이젠 더 미물 수가 없다.

마음을 걷어 부치고 붙박이장을 연다.

우선 입을 옷과 버릴 옷을 구분해 놓는다.

버릴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옷들이 손끝에서 왔다 갔다 한다.

누군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3년 간 한 번도 안 입은 옷은 버리라는 뜻이에요."

그 말을 빌미삼아 쥐고 있던 옷을 버리는 쪽에다 놓는다.

20년 된, 남대문시장에서 1800원 주고 산 박스스타일의 체크무늬 남방이 손에 잡힌다.

어떻게 할까. 그 옷에 담긴 추억이나 기념 같은 건 없다.

그런데 입지도 않으면서 이사할 때마다 끌고 다닌다.

물건을 끼고 사는 스타일은 아니다.

오히려 잘 버리고 잘 주는 게 다반사라 친구는"버리는 게 뭐 그리 급하니?"

혹은 "이거 몇 달 후면 나한테 오겠네?" 하는 말을 듣는 편이다.

바느질도 허접한, 푸른색 바탕의 그 체크무늬 남방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맘에 들어서다.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어디 있을까.

대단한 결심이라도 하는 양, 체크무늬 남방을 버리는 쪽에다 놓는다.   

마음 한켠이 살짝 쓰려온다.

 

이번엔 수납장을 정리할 차례.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꾸역꾸역 잘도 나온다.

녀석이 걸음마를 하기 전부터 사다 신긴 빨강 꽃고무신, 분신처럼 끼고 다니던 빨강 승용차 장난감,

유치원에서 처음 소풍갈 때 메던 코오롱스포츠 작은 배낭.

 

 

이사할 때마다 나를 제일 괴롭히는 건 녀석의 물건이다.

어린 손때가 묻은 그것들을 버리는 건 녀석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여겨서일 터이다. 

배낭만 챙기고 꽃고무신과 운동화, 승용차 장난감을 버리는 쪽에다 놓는다. 

 

쓰레기 속에서 살았나.

버리는 물건들이 100리터짜리 쓰레기 종량제 봉투로 몇 개인지 모르게 담겨 나간다.

살 때는 분명 의미 있고 중요했을 물건들이 쓰레기가 되는 건 순간이다.

그래, 그렇게는 살지 말자.


 

이사를 하고 이삿짐을 정리한다.

그만큼 버렸는데도 또 버릴 물건이 나온다.

정리를 해도 끝이 없다.

일에 치여 우울증마저 생긴다.

일손을 놓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다.

예전 집보다 전망이 좋다.

수락산이 마주 보이고, 천을 낀 넓은 삼거리가 눈 아래 보인다.

삼거리엔 차들이 신호를 받느라 서 있는가 하면, 길을 따라 산책하는 사람도 있다.

그때는 산책하듯 살았는지도 모른다.

전세로 산다는 건 어느 면에선 자유다.

보통은 1년, 길어야 2년을 살곤 이사를 했으니 젊어서 겁도 없었나보다.

사는 동네가 지루해진다 싶으면 “우리 이사할까?” 또는 “저 동네는 어떤지 궁금해. 우리 저 동네로 이사할까?” 하곤 이사를 했다.

주민등록초본을 보면 총천연색이다.

서울 시내를 다 돌아다닌 듯하다.

그런데도 싫지 않았으니 마음을 이사했던 모양이다. 

이젠 이사가 무서워진다.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준비해야 할 서류며 절차도 많아지고, 비용이 깨지는 것도 부담스럽다.

몇 년 후에 입주할 집을 기다리느라 임시로 산다 싶으면서도 다시 이사할 걸 생각하면 지레 질린다.

  

이사한 집으로 작가 둘이 놀러왔다.

C작가 왈, “야하, 집이 아담하니 둘이 살기엔 딱이다. 다시 이사할 생각 말고 여기서 그냥 살아라. 전망도 좋구 신혼집 같다야.”

그럴까? 아니, 그래도 한 번만 더. 그곳에 입주하려고 이사한 건데 그럴 수는 없지. 그래, 딱 한 번만 더. 그런 담엔 그냥 짱박혀 살지 뭐.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이사를 했던 때가 그립다.

힘들었던 기억은 전혀 없고 새 환경에 대한 호기심이 컸으니 그때가 부럽다.

몇 년 전만해도 침흘리며 생각한 게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는 꿈. 

1년의 몇 달은 전라도에서, 또 경상도에서, 또 몇 달은 바닷가에서, 아니면 산속에서, 평소에 가고 싶었고 살고 싶었던 곳을 찾아다니며 살기.

이 얼마나 훌륭한 생각인가.

이 또한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생각인가.

현실은, 마음의 이사를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장담할 수 없다.

지금으로선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는 다음 번 이사도,

지금의 이 힘든 정리와 적응을 까맣게 잊고 어디로 이사할까 궁리할지도 모른다.

마음이 현실을 훌쩍 건너뛸 수 있게 부자가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되길. 

버려야 할 물건들을 다시 사들이고 쟁여놓는 이 습관부터 버린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래, 그렇지, 간단히 사는 법을 배우자. 

어떻게 될지 모를 나를 슬쩍 곁눈질해 보는 것도 마음에 든다. 

 

<공감> 웹진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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