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발표한 글

그녀의 이름은

유리벙커 2011. 6. 7. 17:22

 

                                                               그녀의 이름은 



                                                          

춤 선생을 찾아간다.

내게 독과외로 춤을 가르쳐 주는 선생은 우아한가 하면 귀엽고, 귀여운가 하면 무뚝뚝하고, 무뚝뚝한가 하면 친절하다.

춤 선생의 비위를 맞추기란 솔직히 좀 뭣하다. 그런데 나는 춤 선생의 그 변덕스러움에 가까운 변화에 중독된 것인지 거의 매일 춤 선생을 찾아나선다. 

 

딩동! 벨을 누른다.

춤 선생이 문을 연다. 오늘 춤 선생의 얼굴은 난해하다.

콧등에서 콧망울을 거쳐 인중과 입술에 이르는 선은 영락없는 모차르트의 선율인데 분위기는 완전 뭉크의 절규이다.

춤 선생이 문을 열어주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간다.

발걸음은 할랑대는 봄바람인데 어째 냉기가 흐른다.

이럴 때일수록 춤 선생을 조심해야 한다.

지난번처럼 지르박을 추다 느닷없이 탱고로 바꾸기라도 하면 난 사망이다.  

가끔은 이렇게 당하는 내가 한심해 죽을 맛이지만 때려치우기도 쉽지만은 않다. 

매력 때문이다. 춤 선생의 그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은 비밀로 가득 찬 정원이다.

돌고 돌아도 계속 이어지는 비밀의 길, 그 길을 따라가는 재미는 자장면 곱배기에다 탕수육을 시켜준다고 해도 사절이다.

살풋한 향기를 퐁퐁 내뿜는가 하면 얼음공주가 하늘로 오르는 듯한 몽환적인 그림자도 던진다. 

이만한 매력이 어디 그리 흔한가.     

지금이 바로 그때다. 비밀의 정원과도 같은 저 얼굴, 섹시하기가 만점을 줘도 부족하다.  

이래서 나는 바람피울 엄두도 못 내고 죽어라 춤 선생만 찾는다.

 

춤 선생에게 원두커피를 뽑아 내민다.

춤 선생이 별 말 없이 잘 받아 마신다.

고마운 일이다.

잘하면 오늘만큼은 내가 춤 선생을 리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춤 선생이 창밖 저 어딘가를 보며 커피를 홀짝인다.

분위기가 딱 차라투스트라의 독백이다.

으아, 저 지독한 냉소라니, 춤 선생을 리드하기엔 글렀다.

나는 춤 선생의 눈치를 살피며 오늘의 춤을 점쳐본다.

블루스? 차차차? 트위스트? 고고?  자이브? 룸바? 벨리댄스? 소울? 삼바? 살사? 아니면 브레이크댄스나 막춤?

뭐가 됐든 나는 춤 선생이 커피를 다 마시기 전 어떤 춤이든 찍어놓으려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머릿속으로 람바다를 준비하고 있는데 춤 선생이 포크댄스를 하자고 하면 신경질도 나거니와 추기도 싫어진다. 춤 선생과 내가 동시에 같은 춤을 선택할 때야말로 최고의 흥이 나오며

최고의 예술성이 된다는 건 누구에게 물어볼 것까지도 없다.

 

일단 춤 선생의 옷장부터 연다.

춤복은 춤 선생의 성격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많은 의상 중에 오늘의 의상을 고른다는 건 쉽지가 않다.

더구나 어떤 춤을 출지 춤 선생의 의중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꺼내놓는다는 건 살짝 반푼이 짓을 하는 것이다.

헌데 슬그머니 똥배짱이 나온다.

춤복이 든 옷장을 닫고 일상복이 든 옷장을 연다.

청바지와 기지바지, 미니스커트와 롱스커트, 통바지와 레깅스가 많기도 많다. 

우선 레깅스를 골라 입는다.

레깅스로 몸의 태를 고스란히 보여주며 춤 선생 앞으로 간다.

어째 머릿속이 뜨끔뜨끔해지는가 하면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하고 손발이 차가워지기도 한다.

세수라도 북북 했으면 싶은데 춤 선생은 다 마신 찻잔을 들고 아직도 창밖 저 어딘가를 보기만 한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춤 선생이 보든 말든 내복인지 타이즈인지 모를 옷을 입고 차차차를 추기 시작한다.

구두를 신지 않아서 차차차의 핵심인 박자 맞추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차차차를 살사로 바꿔 춘다.

춤 선생이 그제야 돌아본다.

나는 살사를 추다 브레이크댄스로 바꾸고,  브레이크댄스를 추다 벨리댄스로 바꾸고, 벨리댄스를 추다 트위스트로 바꾼다.

춤 선생이 못 봐주겠다는 건지 못 견디겠다는 건지 찻잔을 놓고 다가온다.

나는 땀을 쭈욱 흘리며 춤 선생을 유혹하는 몸놀림으로 소울을 시작한다.

춤 선생이 여느 때와는 달리 내 호흡을 맞받으며 소울을 추기 시작한다.

춤 선생에게서 야릇하고도 기분 좋은 향이, 여우비 냄새 같기도 하고, 새물내 같기도 한 냄새가 난다.

나와 춤 선생은 이제 서로를 홀리며 원더걸스의 텔미로 나간다.

어느 새 밤은 깊어가고 나는 춤 선생과 함께 전신을 다 해 진탕 추고 또 추다 막춤으로 마무리한다.

  

새벽이다. 조간신문이 춤 선생 집 대문 앞에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제야 춤 선생의 집을 나온다.

대문 앞에 떨어진 조간신문을 춤 선생의 집 담 너머로 던진다.

희부윰한 새벽의 밝음이 춤 선생의 문패를 비춘다. 

문패에 적힌 이름은 하나하나 자음과 모음으로 떨어지며 새벽빛에 떠오른다. 

시옷과 오와, 시옷과 어와 리을.

내 눈을 꽉 채우는 그 이름이 다른 어떤 것보다 좋은 선물로 보인다.

 

<<비행기가 뜨는 풍경>>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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