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의 지표는 사진.
사진의 독자성은 기록.
기록의 힘은 역사성.
해서, 우리는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며 ‘나의 늙음’을 알아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늙음은 늙음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1차 산업이 3차 산업화하면서, 3차 산업이 4차 산업으로 빠르게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몸’에 많은 투자를 한다. 즉, 늙음을 거부한다. 주름과 잡티를 막으려 썬크림을 바르고, 주름과 동안에 좋다는 화장품을 사고, 주름을 없애려 보톡스와 리프팅을 하고, 주름이 그대로 보이는 사진에 포토샵을 이용해 주름살을 다림질한다. 손가락 몇 번 터치하면 육십 대가 십 대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진을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하여, 잘 다림질된 사진은 나이를 초월하고, 그러한 얼굴은 마네킹 얼굴이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주름진 얼굴보다 빤빤하게 도화지가 된 백색의 얼굴을 선호한다. 기계화된 얼굴들. 기계화에 익숙해지는 대중들.
속내는 좀 다르다.
관절이 삐걱댄다. 눈이 침침해온다.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위와 장과 간과 폐 등이 각종 질환에 시달린다. 이에 힘입어 온갖 영양제와 병원은 인기 탑을 찍는다.
얼굴의 늙음과 신체의 늙음이 밸런스를 같이 하던 시대는 끝났다.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거대 자본은 이미 많은 영양제를 만들었고, 미디어는 젊어지기 경쟁에 무한 뛰어들었으며, 의학은 시시콜콜 정보를 제공해 건강염려증에 승리를 거두고, 사람들은 쫓기듯 장수만세를 외친다.
그러나 사람들도 알 건 안다. 늙음은 모든 생명체가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라는 것. 나무도 늙고 동물도 늙고 사람도 늙는다는 것.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라는 고전적인 말 같은 것. 그와 더불어 이 시대의 늙음은 적폐에 가깝다는 것도 안다.
얼마 전, 늙음에 관한 강연을 들었다.
강연자의 말인즉, 나이 듦은 정의할 수 없다고 한다. 음악을 듣고,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는 등등이 여러 개로 존재하기에 그렇다고 한다. 부연하면, 음악은 잘 듣지만 먹는 기능은 약할 수 있고, 걷기는 잘하지만 소화 기능은 떨어질 수 있고, 생각은 잘하지만 언어기능은 잘 안 될 수도 있기에, “내가 늙었다”고 정의내릴 수 없다는 말이다. 약간은 낭만적이다.
그럼에도 강연자는 아래와 같은 말로 ‘늙음’을 정의하기도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통화 공포증이 있어 통화를 꺼려하고 카톡마저 부담스러워 하는데, 한 달 통화기록이 두 시간을 넘으면 늙은 겁니다.” “키오스크를 사용할 줄 모르면 늙은 겁니다.”
이런 말은 너무나 단정적이며 ‘늙음’에 겁주기다. 요즘 젊은이들의 현상을 기준에 두고 늙음을 거론한다는 자체가 무리다. 젊은이들이라고 다 통화를 싫어할까? 연인과의 긴 통화는? 부모에게 자주 통화하는 자녀는?
어떤 현상을 일반화시키려면 그만큼 치밀한 자료와 꾸준한 사회적 현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물론 강연자의 자극적인 발언의 핵심은, “나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나이나 늙음을 원망하지 말고 지금에라도 뭐든 배우고 익히라는 메시지다. 그렇다 해도 젊음과 늙음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발언은 적절하지 않다.
적절한 대안도 없다.
늙으면 가난해진다. 몸의 움직임은 굼떠진다. 마인드는 젊은 시절에 멈춰 나이로 서열을 매기려 한다. “라떼는 말이지”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더해서, 늙음은 약자가 된다는 뜻이다. 약자는 보호가 필요한 존재이다. 한마디로 귀찮은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말이다. 귀찮아진 대상은 존중 받기가 힘들어진다. 인격은 무시되고, 존엄의 가치는 훼손당한다. 단적인 예지만, 주름살을 지우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이해되는 지점이다.
늙고 싶어 늙은 사람은 없을진대, 늙음은 너무도 당당하게, 너무도 현실적으로, 개인과 사회와 국가에 대안을 요구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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