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조용한 날들의 기록』을 읽다 흠칫 멈춘 문장 하나.
“다시 아버지 생각. 아버지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모두가 못다 쓴 편지를 남기는 이들이 아닐까.”-157쪽
“아침에 아버지 생각.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168쪽
이 문장에서 나는 꼼짝도 못한 채 있기만 한다.
내게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이고, 엄마는 그냥 엄마였을 뿐이다. 실은, 자식에게 모든 걸 제공하는 희생의 공급자라는, 사회적 관념이 다였다. 엄마 아버지를 하나의 개체로 생각하거나, 인간적 욕망이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시아버지가 생각난다. 시아버진 평생 철도 공무원으로 묵묵히 일하시다 퇴직하신 분이다.
남편에게서 전해들은 말이다.
“아버진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셨는데, 어느 날 도시락을 씻으려는데 도시락 뚜껑에 ‘노랭이’라고 쓰여 있더래. 아버지 친구가 쓴 건데 얼마나 짠돌이였으면 ‘노랭이’라고 썼겠어. 박봉에 자식 다섯을 기르자면 아버진 ‘노랭이’로 사실 수밖에 없었겠지.”
왜 아닐까.
우리 아버지 세대엔 지인의 담보를 서 주던 일이 종종 있었다. 시어머니는 동생의 담보를 섰고, 그 일로 멀쩡하던 집을 날렸다. 자식 다섯의 등록금 용지는 한꺼번에 날아왔을 테고, 시아버지는 홑벌이 박봉으로는 ‘노랭이’가 아니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시절에 언감생심 꿈이라니. 희망이라니, 생각 자체만으로도 죄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꿈이나 희망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애거나 지워버려 존재 자체를 몰랐을 수도 있다. 예컨대, 그림을 그리고 싶다거나, 글을 쓰고 싶다거나 그런 것들. 생계와는 거리가 먼 것들. 사치에 속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기웃대면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아, 스스로 세상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을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맞벌이 시대라고는 하지만 가장의 꿈은 “못다 쓴 편지를 남기는 이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늦었지만 이제야 나는, 세상의 아버지들에게도 자신만의 욕망이 있었다는 걸, 자식이 잘 되는 바람 말고 하나의 인격체로 꿈을 품고 있었다는 걸 알아버린다.
“아버지들은 누구일까.”
마음이 서늘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