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카메라 루시다』

유리벙커 2023. 6. 28. 13:35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는 제목부터 사람을 홀린다. 처음엔 카메라로 루시다라는 여자를 찍어 말하려는 걸까? 참 멋진 제목이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루시다라는 용어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106쪽에 프리즘을 통과하는 대상을 스케치할 수 있도록 만든 기계 장치의 이름이라는 문장만 나온다. 그 문장만으론 카메라 루시다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특별한 프리즘과 거울 또는 현미경 따위를 이용하여 물체의 상을 일시적으로 종이나 화판 위에 비추어 주는 광학 장치라고 나온다. 광학 장치의 명칭치곤 대단히 문학적이다.

 

이 책 제목에 끌려 읽고자 했던 때로부터 제법 많은 해가 지났다. 인터넷 서점에선 여전히 절판이었다. (열화당에서 나온 초판은 1986년이고, 5쇄를 찍은 건 1995년이다. 당시엔 정가가 4000원이고, 2023년 지금은 중고가가 무려 55,000원이다. 그만큼 가치 있는 책이라는 말일 터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보다 사서 읽는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 책이어야 밑줄도 긋고 포스트잇도 부칠 수 있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을 때면 책 곰팡이 때문인지 얼굴이 근질거려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서이다.

그러다 도서관에 갈 일이 생긴 끝에 검색을 해서 겨우 빌릴 수 있었다. 그것도 내가 사는 지역의 도서관에는 없어서, 다른 지역의 도서관에 있는 걸 예약해서 받았다.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카메라 루시다!!

첫 장 첫 문장은 이 책의 내용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예고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 어느날, 나는 우연히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인 제롬의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852년에 찍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 이후에도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놀라움과 함께, ”나는 지금, 황제를 직접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문장은 사진의 과거성과 현존성이 사진이라는 하나의 공간에 머문다는 의미일 터다. 그것은 2부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찍힌 <온실 사진>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마침내 <온실 사진>에서, 나는 어머니를 알아보는 것 이상의 성과를 올린다. 그 사진에서 나는 어머니를 되찾는다. 그것은 닮음을 넘어서는 갑작스러운 깨어남, 말들이 쇠잔해지고마는 홀연한 깨달음, ”그렇게, 참으로 그렇게, 그리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유일하고도 희귀한 명증성이다. -108

너무도 아릿한 말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이야말로 그 이상을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거기서 더 무엇을 말하는 순간, 그 무엇은 무엇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바르트는 어머니의 <온실 사진>에서 본 것이다.

바르트는, 사진을 찍히는 그 순간은 이미 어떤 자세와 표정을 지어야하는지 찍히는 사람이 알게 되고, 그래서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기 힘들다는 뜻을 표한다. “‘보여지는 나는 포즈를 취할 동안 내 자신을 조직하고, 순식간에 다른 육체로 만들고, 미리 앞질러 스스로를 이미지로 변형시켜 버린다.”-18.

바르트는 <온실 사진>에서의 어머니가, 일종의 표정 관리를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어머니의 본 모습을 찍힌 것에 방점을 찍는다.

바르트는 한 장의 사진이 세 가지, 즉 만들기, 받아들이기, 바라보기(16)를 중심에 두면서 자신의 철학을 풀어낸다. 특히 사진이 주는 현장성에 주목한다. 79쪽의 문장은 바르트가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한다. “한 장의 사진에서 내가 의도하는 것은 예술이나 전달체계가 아니라, ‘대상물이며, 그것이 바로 사진의 기반을 이루는 질서이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거기에, 즉 무한과 주체자(촬영자 혹은 구경꾼) 사이에 펼쳐 있는 장소에 있었다는 것이 그 의미이다.” , 책의 첫 장, 첫 문장에서 나는 지금, 황제를 직접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라는 대목이 바로 바르트가 사진을 말하고자 하는 바임을 알 수 있다.

사진에 문외한이자 사진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로서는 카메라 루시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부 꿰뚫지는 못한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는 말은 많다.

12: 사진이 재현시키는 무수한 것들은 단 한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즉 사진은 실존적으로 다시는 되풀이 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재생산 시킨다.

27: 나는 눈으로 보고 느낀다. 그러므로 구별하고, 바라보고, 그리고 생각한다.

39: 사회는 순수한 의미를 경계하는 것 같다. 그 의미(효과가 아니라)가 너무 인상적인 사진은 곧 외면한다. 사람들은 사진을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미학적으로 소비하기 때문이다.

24: 결국 사진은, 두려움을 주거나 찡그리거나 비난할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길 때 파괴적이란 특성을 갖는다.

45: 보도사진은 흔히 단일사진이다. 충격은 있지만 혼란은 없다. 소리칠 수는 있지만 상처를 입힐 수는 없다. 보도사진은 단숨에 받아들여진다.

포르노 사진도 단일사진이다. 순박하며 고의가 없으며 타산적이지 못하다. 단 하나의 반짝이는 보석을 보여줄 뿐인 유리창처럼 포르노 사진은 성()이라는 단 하나의 대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82: 사진을 탄생시킨 것은 화학자들이다. 과학적 정황(광선에 대한 할로겐의 감도를 발견해낸 것), 다양하게 조명된 피사체로부터의 광선을 직접 포착하여, 그것을 새겨낼 수 있도록 해 준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글자 그대로 대상물의 발산이다. ... 일종의 탯줄과 같은 끈이 사진 찍힌 대상의 육신과 나의 시선을 연결시킨다.

90: 사진의 이미지는 충일한, 가득찬 것이므로, 거기에 무엇인가를 덧붙일 공간은 없다.

91: 사진은 미래지향성을 갖지 않는다.

92: 사진은 폭력적이다. 그것은 사진이 폭력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매번 강제로 시선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며, 사진에 있어서는 거부당하고 변형되는 것도 없다. ( 많은 사람들이 설탕은 달콤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설탕은 폭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107: 사진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명증성이다. 명증성, 그것은 분해되기를 원치 않는다.

108: 분위기라는 것은 어떤 정신적인 것, 삶의 가치가 신비스럽게 얼굴에 반사되도록 이끌어가는 것이 아닐까. 분위기는 그러므로 육체에 동반하는 빛나는 그림자이다. 사진에 생명을 주는 것은 이 가느다란 탯줄에 의해서이다.

117: 우리는 일반화 된 상상 속에 살고 있다. 미국을 보라.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지로 변하고 있으며, 이미지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도, 생산되지도, 소비되지도 않는다.

소위 선진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예전의 사회가 신앙을 소비했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은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덜 광신적이지만, 또한 보다 허위적인(진정한‘) 사회이다.

* 롤랑 바르트는 1915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바르트가 살았던 시대엔 영화는 있었지만 휴대폰은 없었고, 동영상이라는 것도 없었고, 유튜브라는 것도 없었다. 바르트가 이 시대까지 살아 있다면, 사진과 동영상, 사진과 유튜브에 관한 이론은 또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나의 소설 > 독서감상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베카』  (0) 2023.08.17
『고비에서』  (0) 2023.08.12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0) 2023.06.01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0) 2023.05.31
『댈러웨이 부인』  (0) 2023.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