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프니 듀 모리에는 1930년 장편소설 『레베카』를 출간한다. 지금(2023년)으로부터 93년 전의 작품이다. 세월을 건너 그 시대를 읽는다는 건 대단한 즐거움이다.
환경적 배경은 영국의 대저택 멘덜리이고, 인물적 배경은 귀족과 하층민이다. 인물적 배경을 더 파고 들면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등과 욕망이다.
이 소설은 1인칭으로 서술되는 ‘나’가 멘덜리로 가는 길을 회상하는 걸로 시작한다.
‘나’는 귀부인의 시중을 드는, 하녀는 아니지만 그와 다름없는 신분이다. ‘나’가 시중을 드는 벤호퍼 부인은 몬테카를로 호텔로 휴가를 온다. 그 호텔에서 ‘나’는 드윈터 맥심이라는, 멘덜리 대저택의 귀족을 만난다. 멘덜리 대저택은 그림엽서에 나왔고, ‘나’는 어린 시절 그 그림엽서를 간직했던 터다. 그 으리짜한 귀족은 ‘나’를 신분과 상관없이 마음에 들어 한다. ‘나’는 벤호퍼 부인의 눈을 피해 맥심과 데이트를 한다. 맥심은 1년 전에 상처한 사람으로 ‘나’에게 청혼한다. 그때 ‘나’는 21세의 아가씨이고 맥심은 42세의 중년남자다.
‘나’는 맥심과 결혼식을 생략한 채 결혼을 하고 멘덜리 대저택으로 온다. 멘덜리는 그림엽서에 나온 그대로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나’는 대저택의 안주인이 되었지만 하인들은 ‘나’를 안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가 오기 전의 안주인인 레베카와 비교를 하며, 사소한 것들조차 다 레베카가 했던 대로 한다. 레베카는 죽었지만, 하인들은 물론 주변 인물들에게 완벽한 하나의 신앙적 존재로 군림한다. 특히 하녀장인 덴버스 부인은 겉으론 공손하지만 ‘나’를 적대시 한다. 레베카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귀족들의 기본적인 비주얼인 고급 옷과 우아한 머리가 아닌, 직모에다 볼품없는 옷과 신분으로 괴로워한다. 레베카처럼 유능하지도 못하고, 독립성도 없고, 레베카보다 외모도 떨어지고, 소위 아랫것들에 끌려 다니는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덴버스 부인은 그런 ‘나’를 으스스한 눈길로 감시하고, 나는 자꾸만 덴버스 부인에게 조종당한다. 덴버스 부인은 죽은 레베카의 방을 살아있을 때의 방으로 보존하면서, ‘나’를 죽으라고 협박한다.
그렇게 ‘나’는 주눅이 들어 지내지만 맥심에 대한 사랑으로 버틴다. 안개가 짙던 어느 날이다. 지나가던 배가 멘덜리 소유의 해변에서 좌초된다. 그 일로 배의 일부가 바닷물에 잠기고, 배 밑에서 레베카의 개인 요트가 발견된다. 요트 안에는 레베카가 반듯이 누운 채 죽어 있다.
그러기 전, 레베카는 요트로 바다에 나갔다가 바위에 산산이 부서진 시체로 발견되어 장례를 치른 터였다.
그 일로 맥심은 자신이 레베카를 총으로 죽여 사고사로 위장했던 일을 ‘나’에게 고백한다. 사실 레베카와 맥심은 겉으론 완벽한 대저택의 주인 행세를 했지만, 레베카는 사생활이 문란했고, 그 사실을 안 맥심은 멘덜리를 지키기 위해 계약을 한다. 레베카는 유럽에서 최고의 대저택을 만들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맥심은 레베카의 사생활를 묻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레베카는 하인이며 주변 인물들을 유혹하고 사촌과는 깊은 관계를 한다. 그럼에도 하녀장 덴버스 부인은 레베카를 완벽한 신으로 간주한다.
레베카의 죽음을 둘러싸고 살인이냐 자살이냐 조사가 시작된다. 맥심과 ‘나’는 자살로 끌어가려 애를 쓰고, 레베카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던 조카는 돈을 바라 맥심을 협박한다. 그럼에도 맥심의 인맥들은, 멘덜리로 대신할 수 있는 귀족의 신분을 무시하지 못해 은연중 자살로 결론을 내린다.
‘나’와 맥심은 잠정적으로 살인 무죄라는 결론을 얻고 멘덜리 집으로 향한다. 집에 가까워지자 멘덜리가 불에 타는 걸 본다. 덴버스 부인이 집에 불을 지르고 잠적한 것이다.
『레베카』를 읽는 내내 감탄했던 건 재미와 흥미다. 멘덜리 대저택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디테일한 묘사는 대단하다.(아닌 게 아니라 듀 모리에 부부는 멘덜리로 대신할 수 있는 대저택을 임차해 25년 간 살았다고 한다) 또한 인물들이 주는 심리적 묘사는 소설만이 줄 수 있는 특권에 가깝다.
우선, 맥심/멘덜리로 대표할 수 있는 캐릭터는 물질적 풍요와 명예를 중요시 한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기저엔 멘탈리티를 추구하는 면도 있다. 즉, 천민 출신인 ‘나’/사랑을 택한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선택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에 반하는 인물로는 레베카가 있다. 자유로움을 추구해 여러 남자들을 유혹해 깊은 관계를 맺지만, 남자들을 인형놀이의 도구쯤으로 여긴다. 맥심과의 결혼도 사랑이 아니라 치밀하고 교활한 계획으로 한다. 자식을 낳으면 맥심의 큰 재산을 다 차지하게 하려는 전략이다. 그로인해 레베카는 맥심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에게 완벽한 인물로 인정받는다.
살펴보면, 맥심과 레베카의 공통 시선은 물질의 중요성에 두고 있다.
두 사람과는 다른 인물로는 ‘나’가 있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에 묶여 갈등과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글을 써도 레베카가 쓰던 펜이라거나, 식사를 할 때도 레베카가 쓰던 식기라거나,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죽은 자와 연결한다.
‘나’보다 더 한 인물로는 덴버스 부인이 있다. 덴버스 부인의 세계는 온통 레베카, 즉 죽은 자에 멈추어 있다. 레베카는 덴버스 부인에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다. 레베카는 흠 없는 신/신앙이다. 덴버스 부인은, 신/신앙이 무너졌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다. 덴버스 부인에게 레베카라는 신은 사고사이지 살인 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헌데 레베카의 남편이었던 주인(맥심)이 레베카를 죽인 것으로 알자 멘덜리에 불 지르는 것으로 자신의 신/신앙을 지킨다.
유령이란 있으나 없고, 없으나 있는 존재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레베카』를 통해 산 사람이 유령에 어떻게 잡아먹히는지 그 과장을 섬세하게 그린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우리는 지금도 정치인을 통해, 연예인을 통해, 혹은 예술가를 통해, 내게 필요한 신/신앙을 만든다. 그 신/신앙은 허상이지만 살아있는 존재로 인격을 지배한다.
『레베카』에 ‘나’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죽은 레베카의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한 점은, 바로 인간의 욕망을 암시하는 듀 모리에의 고도의 전략이다. 즉, ‘나’는 주인공인 듯하나 주변인물에 속하고, 욕망의 대중적 이름은 레베카이기 때문이다. 『레베카』가 시대를 초월해 지금도 읽히는 까닭이다.
대중성과 문학성을 고루 갖춘 작품은 흔하지 않다. 『레베카』는 이 두 지점을 잘 연결한 작품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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