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남양주종합촬영소엘 갔다.
생각보다 넓은 부지에 여러 세트장이 세워져 있었다.
그중 취화선 세트장을 둘러보던 중 거미줄을 발견했다.
저 거미줄을 보라.
얼마나 싱싱한가.
투명 구슬을 매달고 있는 게 인위적인 치장을 우습게 만든다.
저 거미줄의 쥔장은 볼 수 없었지만 처마 어딘가에 웅크려
흐린 날과 갠 날을 감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열두 폭 치마를 펼친 듯 거리낌 없는 저 솜씨가 당당하다 못해 위압적이다.
거미는 건축자가 아니라 건축가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저런 솜씨로 증명해 보인다.
바람만 불어도 찢어질 듯 늘어져 있지만 천만에.
거미줄의 질김은 누구나 다 아는 일.
그래서 거미줄을 신기술에 접목한 일은 이제 새로울 것도 없다.
대담하게도, 집과 집 사이를, 누구라도 봐도 된다는 듯,
거리낌 없이 이어 만든 저 집은 사람으로 치면 호화주택이다.
그래서 세트장의 집과 저 거미집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뭔가를 흉내내 지은 집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하는 듯하다.
문득,
거미는 비행접시가 사는 동네에서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신공법을 써서 만든 듯한 저 원반의 구체성이 엉뚱한 생각으로 몰고 간다.
나는 거미를 싫어한다.
거미를 연구하는 사람을 빼면 대부분 그러리라 생각한다.
모두가 혐오하는 거미.
그러나 거미는 거미의 생이 따로 있다.
인간과는 다른 생으로 뜻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거미도 인간 못지 않게 문화적일지도 모른다.
저 거미줄을 보면 문화의 상위권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몸을 부려 저런 으리으리한 집을 지을 줄 아는 것은 비단 거미 뿐만은 아니리라.
새 둥지에도 과학이 들어있고
물고기가 알을 낳는 곳에도 치밀한 환경 조건이 들어있다.
그런 것을 보면 인간만이 최고라는 생각은 버려야 할 듯하다.
누가 아는가.
저런 집을 짓고 처마 어딘가에서 시라도 쓰고 있을지.
아니면 세트장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인간의 협소함을 비웃는 소설이라도 쓰고 있을지.
거미에게 한 수 배워도 손해날 것은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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