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 하나를 소개한다.
현대사회의 문제점 중 하나가 선량한 방관자이다.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보아도 방관하기 일쑤다.
길거리에서 선량한 시민이 불량배들로부터 피해를 당해도 그냥 지나친다.
공연히 끼어들었다가 덤터기 쓸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영국 작가 올리버 골드 스미스는 그런 경우를 가리켜 '침묵은 동의를 뜻한다.' 며 침묵한 모두가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골드스미스의 법칙' 이라고 한다.
미국의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악에 대해서 항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악에 협조하는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의 법칙' 도 있다. 그는 말한다. "악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선량한 사람들이 오직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다."
선랑한 방관자를 미워한 사람 중에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도 빠지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인 위기에서 중립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그는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비유로 들면서 선량한 방관자들이 갈 곳은
바로 뜨거운 지옥불이라며 미워했다.
이를 단테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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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펌글을 보니 생각나는 바가 있다.
분명 불의에 속할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내 주위의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
살기 위한 처세다.
나 역시 그 점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순 없다.
그래도 한 마디쯤은 거들 수 있건만 모른 척, 안 들은 척, 입을 다문다.
이러한 사람을 나는 중간자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즉 중간자들은 이쪽에도 편을 들지 않고 저쪽에도 편을 들지 않는 것으로 공평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처세술만큼 비겁한 것도 드물다.
물론, 세상은 투사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변명을 일삼는 비겁자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중간자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만약 세상이라면, 나는 아마도 소신 있는 자를 원할 것이다.
욕을 먹든 칭찬을 받든, 맞는 말이든 그른 말이든,
내 소신을 펼칠 줄 아는 그런 사람을 가장 용감한 자이며 됨됨이가 좋은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우리는, 나 자신이 중간자밖엔 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해도,
몇 번쯤은 중간자들에 대해 노여움을 떨쳐낼 수 없었던 때도 있었을 터이다.
그때 그런 말쯤은 해주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믿었던 사람인데 어쩌면 그때 그렇게 외면과 침묵으로 일관할 수 있었을까?
그런저런 생각이 두고두고 서운함으로 새겨졌을 수도 있다.
중간자들은 그렇게 불편한 자리를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펌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할 말은 하는’ 그런 자리를 쉬이 선택하지 못한다.
불이익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부자라든가 권세 있는 사람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들이 교통비 한 푼을 보태주는 것도 아니고 높은 자리로 승진을 시켜주는 것도 아니건만
우리는 그가 부자라는 이유로, 한다하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 앞에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 마당에 바른 소리를 하겠다니 그거야말로 무뇌증이 아니고야 할 일이 아니다.
세상은 점점 약아진다.
그 기류에 합류는 못할망정 거스를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라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아쉽다.
‘할 말은 하는’ 그러한 세상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되길 바라는 것은 과욕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그게 또 그렇게 어렵다.
어렵지 않게 여길 그러한 날이 오길 진정 바란다.
이런 바람이 순진한 사람의 넋두리가 아니길 잠시나마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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