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걸도 노동이다.
아침에 출근하여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저녁이 되면 퇴근하는 일상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구걸도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걸도 능력이다.
체면을 버릴 수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생활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그 절대성 없이는 구걸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인격을 내던지는 일이므로 그렇다.
구걸할 수 있는 것만도 복이라 했던가.
그만큼 인간이 살아가는/살아내는 일은 어렵다.
1호선 전동차 안에서다.
한쪽 다리를 잃은 남자가 앉은 승객을 향해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이민다.
걸인의 자본은 망가진 몸과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다.
걸인은 자신의 자본을 밑천으로 승객들에게 돈을 요구한다.
승객들은 하나같이 그 걸인을 투명 인간 취급한다.
걸인이 응답 없는 승객들에게서 돌아선다.
내가 백을 열고 지갑을 꺼낸다.
걸인이 얼른 내 앞으로 다가온다.
걸인의 얼굴은 화상을 입었는지 백반증 같은 것인지 피부가 얼룩덜룩하다.
나는 지갑을 열며 작은 고민을 한다.
지갑 안에 천 원짜리가 없으면 어떡하지?
만 원짜리만 있다면 만 원을 주기는 그렇고 어떻게 할까?
다행이 지갑 안엔 천 원짜리가 몇 장 들어있다.
이천 원을 꺼내 걸인에게 내민다.
걸인은 가지 않는다.
잠시 서서 내 지갑을 탐이 나는 눈으로 본다.
그 눈에서 나는 걸인의 말을 읽는다.
그 고급스런 지갑에서 나오는 게 겨우 이천 원이야?
그 지갑, 통째로 날 줄 순 없어?
잠시 서서 내 지갑을 노려보던 걸인이 체념을 하고 돌아선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살짝 기분이 상한다.
고맙다는 말을 기대해서 준 건 아니다.
그러나 상도덕과 마찬가지로, 나는 걸인에게도 예의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구걸도 노동이 아닌가.
사과 한 알을 팔아도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상례다.
사과 한 알을 받아도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통례다.
그게 살아가는 이치다.
너무나 평범한 이치라서 걸인은 생략한 것인가.
시내에서 일을 보고 저녁 늦게 다시 1호선을 탔다.
통로 저쪽에서 새된 소리가,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마치 낡아 뻐걱대는 기계에서 나는 듯한 음이
전동차 안을 쑤셔놓는다.
이게 뭘까.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뺀다.
소리의 진원지가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온다.
맹인이다.
맹인이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노래인지 악을 쓰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통로를 걸어온다.
소리가, 찢기고 갈라져 도저히 사람의 소리라고 할 수 없다.
오전에 봤던 걸인이 생각난다.
갑자기 지긋지긋해진다.
1호선이 지긋지긋해지고, 무차별 공격처럼 전동차 안을 점령하고 다니는 걸인과 그 소리가 나를 미치게 한다.
사람들도 나와 같아서인지 아무도 맹인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이어폰을 끼고 음을 올린다.
음에 빠져들고 싶지만 생각은 산만하게 너울거린다.
구걸도 노동이라 생각했던 게 무참해진다.
구걸도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게 무가치해진다.
승객들이 왜 그렇게 걸인을 투명 인간 취급했는지 이해가 간다.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마주치는 여러 걸인에게 일일이 애정을 표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지쳐있다.
우리 역시 노동자가 아닌가.
걸인 못지않게 피곤하고 힘든 노동자가 아닌가.
상사에게 쪼이고, 아래 직원의 눈치를 보고, 거래처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목표치에 목을 매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무겁디무거운 책임에 치여 살고 있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만 바라기엔 일상이라는 생활은 냉정하다 못해 혹독하다.
착하게 생각하며 살 여지를 주지 않는다.
매일 마주치는 저 걸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직업인이다.
그런데 마주칠 때마다 돈을 쥐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지만, 하고 싶지만, 매일 어린 자녀에게 돈을 쥐어주며 출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상실한 늙은 부모나 조부모에게 매일 돈을 쥐어주며 출근 인사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돈엔 한계가 있다.
마음에도 한계가 있다.
오전에 마주친 걸인에게로 향했던 마음과, 오후에 마주친 걸인에게 향했던 마음이 이렇게 천양지차로 다른 것만 봐도, 인간의 마음은 유동적이며 유동적인만큼 분명히 한계는 있다.
그래서 어쨌다는 얘기?
요는 이거다.
이왕 노동을 할 것 같으면 노동답게 하자는 얘기다.
노동이 신성하다는 얘기를 굳이 꺼내지 않아도 노동, 그 자체는 신성하다.
인간을 인간으로 지켜주는 지지대며 몸과 정신의 가교이다.
그런 노동을 비천하게 만들지 마라.
구걸도 신성한 노동 행위에 속할진대, 비루하게, 불쾌하게 하지 말라는 얘기다.
물론 구걸, 그 자체에는 비루함이 들어있다.
남의 것을 공짜로 원하니 그렇다.
그러나 구걸도 노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자존심을 지키며 할 일이다.
번듯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것만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은 아니다.
구걸은 남이 하는 게 아니라 구걸자 자신이 한다.
그러니 구걸하는 자신에게 자존심을 세워줘야 한다.
구걸할 수 있는 것만도 복이라는 말을 생각한다면,
구걸하면서 고맙다는 표현은 기본자세다.
고맙다는 말을 해본 사람은 안다.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가는 순간 나 자신이 기분 좋아지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그와 동시에 내 품위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하루 살기에도 어려운 걸인에게 너무 어려운 것을 원하나?
너무 복잡한 것을 원하나?
그래서 원한다.
비루해지는 자신을 언제까지나 용납하지 말하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