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피노키오의 코

유리벙커 2011. 9. 30. 00:06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았다.

더불어 과일이며 채소가 맛도 떨어지고 값도 올랐다.

고추 역시 마찬가지.

가을이면 일 년 먹을 고춧가루를 준비한다.

사실, 내가 준비한다기보다 언니들의 성화가 준비해준다는 말이 옳다.

올해도 어김없이 언니의 전화가 고춧가루를 들먹인다.

그만큼 나는 살림에 별 관심 없이 산다.

그래 그런지, 언니는 내가 고춧가루를 안 산다고 할까 걱정하는 눈치다.

나는 예의 매년 하는 질문을 한다.

“작년엔 얼마나 샀지?”

내 살림이면서도 언니가 관리해주는 듯이 당당히 묻는다.

 

그렇게 해서 고추 다섯 근을 샀다.

고추 다섯 근이라고 해봐야 빻으면 세 근정도 나온다.

‘다섯 근’이라는 말에 언니의 불안이 새어나온다.

그것 가지고 김장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나는 고추 값이 워낙 비싸니 그 정도만 사겠다고 말한다.

다른 소비에 비해 살림의 기본이 되는 그런 구입엔 인색한 편이다.

어쨌거나 가루로 빻은 고춧가루가 도착했다.

 

그런 후 얼마 지나 우리 농산물을 공짜로 구입하는 계기가 생겼다.

인터넷으로 20만 원어치 구입하는 것인데, 그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붉은 고추가 나온다.

나 역시 다섯 근이 아무래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세 근을 더 주문한다.

이번엔 가루로 빻아 주는 게 아닌, 고추 그대로다.

주문을 했지만 그것을 일일이 닦아 방앗간에 가져가 빻아야 한다는 숙제가 남았다.

근심이 자꾸 동한다.

내 근심과는 무관하게 고추가 택배로 왔다.

 

고추를 키친타월로 닦는데 문득 피오키오의 코가 생각난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길어진다는 피노키오의 코.

<<피노키오의 모험>>작가 C.콜로디는 코가 늘어나는 것은 말했지만 색깔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피노키오의 코가 길어질 때마다 내가 닦고 있는 이 고추와 같은 색이 아니었을까 상상한다.

 

평생을 살면서 거짓말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 색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고추와 같아진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당황하며 변명을 일삼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코는 점점 더 새빨개질 것이고,

그 새빨개짐을 만회하기 위해 변명과 거짓말은 늘어날 것이고....

그러다 사람들은 다 같이 배를 잡고 웃지는 않을까.

 

갑자기 국회 청문회장이 떠오른다.

한 사람은 주었다는데, 받았다고 혐의 받는 사람은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원고와 피고, 그러한 대립의 관계에 오해나 오판이 없어지려면 피노키오의 코가 필요하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해를 받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고추와도 같은 코가.

피노키오의 길어진 코에다 내가 닦고 있는 이 고추를 붙여본다.

C.콜로디의 피노키오의 코가 새삼, 지혜의 본산으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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