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가 대세다.
그것도 연예인 급 美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민다.
주름살은 기본, 탱탱 피부는 옵션에 해당된다.
뚱뚱한 것도 용서할 수 없고, 예쁘지 않은 것도 용서할 수 없단다.
꿀피부에, 동안童顔에, 늘씬한 키에, 매끄러운 몸매여야 그나마 시선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길거리를 지나보라.
연예인 급 사람들보다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미의 기준은 연예인 돼버렸다.
그들처럼 안 되면 안 된다는, 어떤 강박증 같은 것이 사회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연예인, 그들은 미의 전문가다.
그걸로 밥벌이를 하니 안 그런가.
그런 연예인을 기준에 두고 맞추려니 가랑이가 찢어진다.
보톡스 맞아보라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그래도 안 맞는다.
안 맞는 걸 고수한다.
일단은 주사공포증, 병원공포증이 있어서이다.
그리고 한 번 맞는다고 주름살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육 개월에 한 번씩은 맞아주어야 한다니 그 번거롭고 아픈 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런 고통을 감내할 만한 비용도 시간도 아깝다.
흔히들, 예뻐지는데 그런 고통쯤이야 하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말에 감동이 안 된다.
아무리 예뻐진다지만 아픈 건 아픈 거니까.
주름살, 나라고 그것이 좋을 리 없다.
거울을 보면 눈가가 신경 쓰이고, 해서, 아이크림을 정성껏 바른다.
그게 전부다.
칼을 댈 마음은 아직 없다.
주름살도 주름살 나름이라는, 나만의 철학인지 변명인지가 생긴다.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 중 나이 좀 들었다는 연예인을 보면 하나같이 눈가가 엉망이다.
쌍꺼풀 라인은 찌글찌글하고 볼이며 턱은 필러를 하고 잡아당겨 겉보기엔 탱탱하나
속으로부터 나오는 탱탱함이 아닌, 억지를 부렸다는 게 역력하다.
수차례 칼을 댔으니 피부가 견뎌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그들은 연예인이니 그렇다 치자.
아니, 연예인이니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연예인이 우리와 같은,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와 같다면 누가 봐줄까.
있는 그대로라면, 직무 태만에 해당될 것이다.
가끔, 얼굴 전체가 주름살로 덮인 노인들을 볼 때가 있다.
어떤 할머니는 그 많은 주름살이 예뻐 보이는가 하면, 어떤 할머니는 험해 보인다.
같은 주름살이건만 예쁜 주름살이 있는가 하면 미운 주름살이 있다.
그것은, 결국, 어떻게 살아왔다는 명징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주름살로 살기로 했다.
요즘 세상에 소박한 생각일지 모르겠다.
아니, 미련한 고집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내가 살아온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게 좋다.
주름살이든 꿀피부든, 내 몸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그대로, 그게 좋다.
연예인 안성기를 보라.
그의 얼굴은 굵은 주름살이지만 얼마나 푸근하고 넉넉해 보이는가.
오히려 주름살 때문에 정이 듬뿍 가지 않는가.
그 외에도 노벨문학수상자 시인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를 보라.
그의 얼굴 역시 주름살 투성이지만 얼마나 지성적인가.
주름살이 그의 지성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면 내 눈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지하철에서 본 어느 할머니의 주름살이,
안성기며 쉼보르스카의 주름살이,
억지로 만든 꿀피부나 탱탱 피부보다 더한 미를 가졌다고 본다.
그들에게 주름살은 결코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다.
열심히, 잘 살아왔다는 대답이며,
억지를 부리며 살지 않았다는 순응의 표시이다.
주름살에도 긍정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렇게 살기로 했다는 것을,
나는 내게 발표한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