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소설을 쓰기 전

유리벙커 2011. 12. 14. 15:55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들은 얼마나, 어떤 종류의 고심을 하는지 되돌아본다.

이 말은 곧 나를 향한 되새김이기도 하다.

서사를 그리고, 인물을 생각하고, 주제를 잡고, 제목을 정하고, 구성과 문체를 마련한다.

거기다 자료수집과 취재까지 해야 할 경우도 생긴다.

더욱이 장편을 구상할 때에는 구상 자체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그리고 그 감성과 생각이 식기 전에 어서 쓰자고 마음이 바빠진다.

그러한 과정 속엔 다른 그 어떤 것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새로 쓸 장편을 구상하면서 나는 예의 메모를 하고, 자료를 수집한다.

인물의 주인공이 곧 내가 될 준비를 하기 위해, 나는 인물과 가까워지려 애정을 쏟는다.

쓸 시기도 중요하다.

앞뒤로 중요한 집안 행사나 약속은 없는지 살핀다.

아직 쓸 시기는 아니다.

자료 준비도 덜 되었거니와 여행 약속도 있다.

막간을 이용해 책을 읽는다.

발자크의 <<나귀 가죽>>.

 

 

서문을 읽으며 나는 소설을 쓰기 전,

작가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해 여기에 옮긴다.

물론, 다 아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작가들의 현주소와 공감대가 새삼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흔히,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는 경우를 두고 서문에선 이런 예를 든다.

 

“라블레는 검소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문체가 보여주는 게걸스러움과 자신의 작품에 나타난 인물들과는 정반대였다.”

 

“<<에바>> <<멜모스>> <<버트람>> 등을 쓴 마투린은 목사이지만 멋 부릴 줄 알고 바람기도 다분하여 여자들을 즐겁게 해줄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무시무시한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밤이 되면 여자에게 나긋나긋한 댄디로 변했다. 부알로도 그랬다. 그의 온화하고 공손한 대화는 까칠하기 그지없는 그의 시의 풍자 정신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가장 침울한 비극의 작가들은 존경받는 원로였던 뒤시가 증명하듯이 일반적으로 매우 온유하고 가정적인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었던가?”

 

 

 

독자의 시선에 관해 이런 말도 덧붙인다.

 

“작가란 죄인이 아니면서도 범죄를 모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대중에게 납득시키기는 지극히 어렵다.”

 

 

 

문학과 작가와의 관계를 말하는 대목을 보자.

 

“문학은 사유로 자연을 재현하려는 목적을 가진 만큼 뭇 예술 중에서 가장 복잡하다.....(중략) 작가는 모든 효과, 모든 속성과 친숙해져야만 한다. 그는 자기 안에 집중 거울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상상을 통해 온 우주를 그 거울에 비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시인은 물론이고 관찰자 정도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 나아가 기억해야만 하고, 자신이 받은 인상을 단어의 선택 작업 속에 각인시켜야 하고, 그 인상을 이미지의 도움으로 치장하거나 그 인상에 원초적인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라면 한 권의 책을 쓰기 이전에 모든 성격을 면밀히 분석하고 모든 풍속을 겪어보며 지구 전체를 주유하고 모든 열정을 느껴보아야 한다. 혹은 정념과 나라, 풍속과 성격, 본성에 관한 일과 도덕에 관한 일, 이 모든 것이 그의 생각 속에 들어와야 한다. 작가는 둠비디키 영주를 그릴 때는 수전노가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잠시나마 수전노 근성을 몸에 지녀야 한다. <<라라>>에 대해서 쓸 때는 죄인이 되거나 범죄를 모의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죄인을 불러 그를 관찰해야 한다. 이 두뇌- 문학의 논법에는 따로 매개항이 없다.

 

 

“피렌체를 가장 열렬히 사랑하고 가장 정확하게 그린 화가가 한 번도 피렌체에 가본 적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모든 작가는 단에서 사하라까지 가보지도 않고서 사막과 사막의 모래벌판, 신기루와 종려나무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 우리 세대가 겪는 것과 같은 것을 그 시대(발자크의 <<나귀 가죽>>은 1831년 출간)에도 겪고 있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요즘의 저작물들은 핏빛으로 온통 벌겋게 물들이는 경향에 대한 불만이 도처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잔인한 장면, 처형 장면, 바다에 수장된 사람들, 교수형당한 자들, 교수대, 죄인들, 격렬하고도 냉혹한 잔혹상들, 사형집행인들, 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 (중략)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는가?”

 

 

“그렇다. 재의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흐르고 인간의 지식은 도처에서 매우 힘차게 솟구쳐 넘치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책을 출판하는 동안에 벌써 많은 사상이 구닥다리가 되었거나 확실히 규명되었거나 발표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상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희생시켰다. 그가 작품에 담을 생각이 없었음에도 버리지 않은 사상들은 아마도 작품의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남았을 것이다.”

 

 

 

위의 말처럼 작가들에게 절실히 다가오는 것도 드믈 것이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그렇게 쓴 글이지만 이미 다른 작가에 의해

그와 거의 비슷한 작품으로 발표되었다면 그 속상함은 어떠할 것인가. 

또한 그렇게 힘들여 쓴 글이 발표할 지면을 찾는 동안 ,

이미 시대의 빠른 조류에 밀려나 사장된다면 그 상실감은 어떠할 것인가.

그래서 작가들은 미발표작에 대해 미치도록 예민하다. 

열심히 썼으나 미련없이 버려야 하는 자기 작품에 대한 쓰라림은

곧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포기이자 채찍질이니 그 아픔이 만만할 리 없다.  

나를 포함하여 지금도 저러한 상황에 처한 작가들은 많다.

그들에게, 곧 나에게, 나는 이 글로나마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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