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P&M -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에서

유리벙커 2012. 2. 7. 16:55

 

『파우스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괴테의 희곡이다.

선과 악의 대결, 혹은 악에게 영혼을 판 이야기,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시피하다.

그러나 과연 괴테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전부였을까.

『돈키호테』가 풍차나 무찌르는 망상적 인물의 모험담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것처럼,

『파우스트』역시 그렇게 전해진 점이 많다.

 

 

흔히 알고 있듯이, 메피스토펠레스(앞으로 M이라 약칭)는 악을 대변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M은 파우스트(앞으로 P라 약칭)박사에게 나타나 선과 악, 또는 이성과 감성의 본질적 문제점을,

경험을 던져줌으로써 알아가는 과정을 제시한 인물이라고 본다.

M은 ‘무조건 나쁘다’는 악의 대변자라기보다,

우리가 굳이 외면한, 혹은 감추고 싶어 했던 진실/본능의 문제를 솔직히 일깨워 주는 도움자, 매개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어투는 냉소적이나 인간을 향한 페이소스가 담겨있고, 현실을 풍자적으로 조롱하나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기도 한다.

 

 

P가 연구실에 박혀 연구만 하고 있을 때, P는 이미 연구실 ‘밖’을 원한다. 그가 원하는 ‘밖’은 자아의 밑바닥이다. 어떤 자아인지, 이성만이 진실인지 P는 의구심을 가진다. 그런 점을 P는 한탄으로 드러낸다.

 

 

 

                                                       신과 닮은 나는 이미

                                                      영원한 진리의 거울에 아주 가깝다 생각했고,

                                                      하늘의 광채와 밝음 속에 노닐면서

                                                     속세의 아들이란 탈을 벗어버렸다.

                                                     천사 케롭보다 뛰어난 나는 이미

                                                     자유로이 자연의 혈관 속을 흐르며

                                                     창조적으로 신의 삶을 향유하리라는 예감에 차 있었는데

                                                     나, 이 무슨 창피한 꼴이란 말인가!

                                                     우레 같은 말 한 마디에 혼비백산하고 말았으니.

 

 

 

그때 M이 나타나(실은 나타났다기보다 P가 원해서 등장한) 이성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P를 비판하며

P가 원하는 게 실은 아름다운 여인(본능)임을 지적한다.

그렇게 해서 만난 게 마르가레테이다.

P는 그 어린 소녀를 사랑하지만 M은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P의 더 큰 욕망을 자극한다.

 

 

 

1권은 마르가레테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2권은 P가 원했던 미의 여신 헬레나를 만나는 여정이 전개된다.

2권은 1권과는 달리, 무대가 넓어진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헬레나를 만나기 위해 황제의 궁성이 나오고,

왕, 국가, 인조인간, 전쟁, 지폐의 출현이 이어진다.

지극히 판타지로 이어지면서, P는 M과 함께 그 궁성에 나타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 전쟁의 장면은 성경에 나오는 전쟁 장면과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을 연상케 한다.

그렇게 해서 헬레나를 만나는데,

 특이한 것은 헬레나가 파리스(즉, 트로이)에게서 다시 메넬라오스(즉, 스파르타)로 돌아와 겪는 일이다.

이미 남의 여자였던 헬레나를 메넬라오스와 하녀들은 천대를 하고,

제물로 바쳐질 운명에 처한 헬레나에게 P는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P의 품에 안긴 헬레나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본능과 쾌락은 일순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P는 헬레나를 잃었지만 왕궁에선 승전으로 이끈 공로로 해변에 있는 토지를 하사한다.

그곳에선 부족한 게 없으나 P는 해변을 전면으로 바라보기 원해

그곳에 예전부터 터를 잡고 살선 노부부를 제거한다.

이때 M은 “나보테의 포도밭이라는 게 벌써 있었지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열왕기에 나오는 것으로,

사마리라 왕 아하브가 궁전 옆에 있는 나보테의 포도밭을 강제로 빼앗는 이야기다.

그것은 다 가진 자가 한 개만 가진 자의 것마저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는 탐욕스런 인간을 빗대어 한 얘기로,

P가 그와 같다는 걸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와중에,

M은 성직자의 타락과 당대 가톨릭 신권이 지배하는 현실을 삽화로 드러내고, 달변으로 일갈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부인하고 싶어 하는 그 본성적 인성을 캐내는 것을 악 또는 악마라 지칭한다면,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여겼던 시대에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막이 바뀌면서 ‘결핍’ ‘죄악’ ‘근심’ ‘곤궁’이라는 여자들이 나타난다.

그중 ‘근심’이라는 여자는 P에게 “인간이란 한평생 앞을 보지 못하니, 파우스트, 당신도 이제 장님이 되세요.”라고 말한다.

이에 P는 눈이 멀어 죽는다.

M과 그의 졸개들이 P를 매장하고 P의 영혼은 악마가 되는 게 아니라 천사의 도움으로 천상으로 올라간다.

 

 

 

 

한마디로, 『파우스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선과 악이라는 장치를 이용해 밝혀보려던 작품이다.

그런데 모든 죄를 두로 섭렵한 파우스트에게 괴테가 구원을 허락한 것은 조금 의문이다.

다시 생각하면, 괴테는 선(이성)과 악(본성)을 전부 거친 인간에게 구원의 자격을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결국 선이 이긴다는 메시지로밖에 읽을 수 없는 것은 이 작품의 한계로 느껴진다.

물론 고전주의 시대였던 당대(1733년)의 시대상과 이념을 담았다고는 하나

선을 최상에 두는 것에는 아쉬움이 든다.

과연, 선, 악, 이성, 진실, 본성이란 무엇인가.

우리 인간에게 이것이 바로 선이다, 혹은 진실이다, 라고 정할 수 있는 게 있긴 있는 것인가.

답이 없는 답에 매달려 사는 게 우리 인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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