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이상국 선생님에게서 시집 <뿔을 적시며>를 받았다.
역시나,
이번 시집에서도 선생님의 그 단골 음성을 만날 수 있었다.
아래 시처럼 아리면서도 애틋한 마음의 결이,
또 부성애가 짠하게 번져온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선생님은 우리를 대신해 고른 호흡으로 세상에 내어놓는다.
먼 배후
좋아하는 계집아이네 집 편지통에
크리스마스카드를 던져놓고
멀리서 지켜보던 때가 있었다
나는 카드를 따라 그애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해가 져도 그애는 나타나지 않았고
오랫동안 밖에서 서성거리던 나는
언젠가 그애가 멀리 시집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자애들은 그렇게 시집을 갔다
아주 많은 세월이 지났고
또 나는 그애의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았지만
사철나무 울타리에 몸을 감추고
누군가를 기다리던 한 소년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리다
혜와역4번 출구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4번 출구 앞에서
그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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