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언어의 숙명 혹은 변신

유리벙커 2015. 6. 26. 14:50

 

어느 지인은 내게 말했다.

“나는 ‘절대로’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 말은 한계를 정하기 때문에 여러 부분을 포용할 수 없어섭니다.”

또 다른 지인은 내게 말했다.

“나는 ‘한계’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은 앞으로 나아갈 길에 제한을 두기 때문입니다.”

나는 두 지인의 말을 접하면서 그렇다면 ‘결코’라는 말도 함부로 쓰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코’ 역시 한계를 정하는 말이 되니까.

 

 

언어는 분명 사람이 만든 것일진대,

누군가에게는 싫은 언어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관철시키는 언어로 사용된다.

굳이 말하면 언어의 숙명이다.

 

 

언어의 숙명 혹은 자의성이 요즘처럼 활발한 때도 드물다.

언어는 이제 재생산/재창출되어 신종어를 출산한다.

약어는 기본이 됐고 암호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 저변엔 거론할 것도 없이 SNS가 있다.

스피드가 아니면 존재 자체가 불편해지는 세상에서

발화자는 의사소통만 가능하면 그게 뭐가 됐든 수용한다.

이모티콘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모티콘은 그림이자 기호지만 그것 역시 언어다.

그렇게 빠르고 편리한 언어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할까.

 

 

잉크에 펜 끝을 적셔 행여 종이에 번질까 마음을 다하며 쓰던 시대는 구닥다리가 됐다.

붓으로 한 자 한 자 쓰던 시대 역시 구석기시대가 됐다.

글씨를 道(도)로 여기던 시대는 종말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복고풍이 유행을 하면 언어 역시 복고풍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 언니는 가끔 복고풍 언어를 써서 배꼽을 잡게 한다.

내가 낮잠을 자겠다고 말했을 때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오수를 즐겨라~”

위의 말은 70년대 문학에서 자주 쓰던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그 시대로 돌아간 듯, 즐겁게 웃었다.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다른 집도 그 가족만이 아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특히 사투리를 쓰는 집안엔 그들만이 즐겨 쓰는 언어가 있다.

우리 집엔 재봉틀을 '재봉침'으로, 괜히 짜증을 부리는 것을 '뜬승났다'고,

골이 난 것을 '틀물레났다'고 말한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모택동 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한 말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나 정서, 환경, 감성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때론 정겹고 때론 그리움을 자아낸다.

언어의 또 다른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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