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다양성의 까칠함

유리벙커 2015. 6. 29. 00:56

우리는 흔히 ‘다름’을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다양성을 받아들이자는 말이기도 하다.

헌데 현실은 그럴까?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건 나뿐인가?

소수자들의 정체성 차별, 인종차별의 무차별성,

그러한 거대 담론은 여차치고 우리는 가까이에서

‘다름’에 관한 ‘다름’을 여실히 실감한다.

스승의 철학과는 달라도, 선배의 생각과는 달라도, 어른의 정서와는 달라도,

적당히 넘어가거나 맞다고 맞장구를 친 적은 없나?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가 ‘괘씸죄’에 걸린 적은 없나?

시간이 지나고야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으로 찍혀버린다는 것을 깨달은 적은 없나?

나 역시 누군가를 괘씸죄로 찍은 적은 없나?

‘다름’에 관한 ‘다름’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했던 슬픈 현재이기도 하다.

 

 

얼마 전 전문직 자격을 심의하는 분과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분은 고도의 특수 전문직 종사자들을 심사/재심사 한다.

심사/재심사를 치르는 사람들은 이미 현장에서 전문직으로 일하는 사람들로,

레벨을 한 단계씩 올리려는 사람들이다.

이때 심의관은 레벨에 따른 실력은 물론 인성과 판단력도 체크한다.

나는 궁금해서 그 분께 물었다.

이미 내놓아라 하는 전문분야를 직업으로 일하는 사람들인데 떨어뜨린 적이 있냐고 했다.

그 분은 실격과 합격에 따른 경험담 하나를 말했다.

여기서 나는 그 분의 직업을 말해야 하기에 평가자와 피평가자로 대체해서 말하겠다.

자격시험이 끝난 후, 심의관(평가자)은 자격시험을 치르는 사람(피평가자)의 잘못을 지적했고,

레벨 자격 심사에서 실격으로 처리했다. 이에 피평가자는 평가자의 말에 반박했다고 한다.

피평가자의 반박에 평가자는 순간 “어, 이놈이 나한테 대들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평가자와 피평가자는 실격 이유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조목조목 따졌다고 했다.

결국 평가자는 피평가자를 합격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그 분의 말은 이렇다.

“나한테 와서 그렇게 따질 정도로 배짱이 좋은 놈이라면 합격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실격 이유도 지식이나 기술에 관한 것도 아니고 말하는 습관에 있었던 거라 본인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거였습니다.”

매뉴얼만 고집하지 않는 융통성. 가능성으로 사람을 보는 안목.

상대가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해도 이의를 달 줄 아는 적극성.   

나는 이런 분들이 참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이다.

그 말은 일반성/보편성에 흡수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조금이라도 튀면 제거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모난 돌이 정을 맞을 때, 멋진 작품이 나오고 다양한 사고가 나온다는 건 이미 아는 사실이다.

몰라서가 아니다.

알지만 그렇게 길들여진 우리의 사고가 바리게이트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소위 열린 사고/단체라고 자칭/타칭하는 사람들도 자신과 다른 해석을 내놓으면 참지 못한다.

그게 현실이라고 물러나면 끝은 자명하다.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아니 내지 않겠다면, 스스로 ‘을’의 자리에 있겠다는 포기 각서와 다르지 않다.

이 또한 나의 아픈 고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