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를 켜면 경쟁이라도 하듯 요리하는 장면과 먹는 장면이 나온다.
요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부엌’ 혹은 ‘주방’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부엌’이 여자들만의 전유공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것은 아파트가 등장하면서다.
아파트가 생기자 ‘부엌’은 버려야 할 촌스러운 단어로 전락했고,
아파트에 어울리는 ‘주방’이라는 용어가 새 주인이 된다.
아파트는 거실의 문턱과 방의 문턱을 없애는 것으로 주방을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시켰다.
문턱 없이 누구나 들락거리며 음식을 해먹기에 편리한 공간.
이제 남자들이 주방에서 음식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장면은
어색한 게 아니라 ‘칭찬 받아 마땅할’ 혹은 당연한 모습이 됐다.
거기다 오일 제 근무 요건과 늦은 결혼, 독신 남녀들의 증가는 남녀 모두를 주방으로 불러들이기에 충분했다.
주방으로 모인 그들은 요리를 한다.
인터넷에서 본 레시피를 따라 하기도 하고, 자신이 만든 음식을 SNS에 올리기도 한다.
이에 맞춰 먹방 프로그램이 생긴다.
먹방엔 음식의 종류도 다양하고 음식을 ‘먹어치우는’ 양도 대단하다. 예전 같으면 공공장소에서 입을 쩌억 벌리고 먹거나 턱 밑으로 뚝뚝 떨어뜨리거나 입가에 묻히는 건 야만 내지 무식에 속했다. 그러나 전국구를 타는 먹방 출연자들은 오히려 그러한 점을 부각시킨다. 리얼함의 정점을 찍겠다는 연출자의 의도다.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도 시청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다.
헌데 먹방과는 다른 한편에선 아이러니하게도 다이어트가 난리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빼자?
먹는 것도 상술이요 빼는 것도 상술?
상술에 놀아나는 시청자들?
왜들 이렇게 먹고 빼는 것에 열광할까.
식탐을 부추길 땐 언제고 그것을 빼라고 성화를 부리는 건 또 뭔가.
먹방과 다이어트를 하나로 묶어 보여주는 예가 있다.
입이 찢어져라 미어져라 먹는 먹방 연기자들은 대부분 날씬하고 예쁜 여자다.
화면에선 “나 요렇게 먹어도 요렇게 날씬하답니다” 말하는 것 같지만 시청자는 속지 않는다.
저렇게 먹는 것은 연기이며, 연기가 끝나면 저 연예인은 어디 화장실에 가서 토하든지 설사약을 먹든지, 저 프로에 나올 때까지 굶든지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어디에 무엇에 근거하고 있을까.
먹방과 다이어트는 사회가 던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컨대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는 것으로 해소한다.
위하수가 되도록 먹은 후면 손가락을 넣고 게워낸다.
즉, 먹고 게워내기.
지금의 우리 사회는 불안의 정점을 향해 간다. 아니, 정점을 찍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 침체, 높은 실업률, 정치적 갈등은 집단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집단은 개개인이 모인 구성체다.
다시 말해 사회의 소속원인 개인이 사회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말이다.
티브이에 나오는 먹방과 다이어트는 사회의 그늘을 가리려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한 번 더 방점을 찍자면, 먹방 프로그램은 단순 오락거리가 아니라,
사회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극명한 증거다.
먹고 게워내기를 충실히 하는 사회,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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