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유리벙커 2019. 2. 11. 18:25



책에도 시기에 따른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이 책은 절판되어 2006년에 제본을 떠 만났다.

지금은 2019. 무려 13년이 흐른 후 이 책을 펼친다.

책을 보니, 앞부분 조금은 읽은 흔적이 있다.

너무 어렵다 싶어 읽다 방치한 것이다.

나는 책을 어느 갈래로 묶는 것을 싫어하지만, 사람들은 이 책을 임종문학, 고백문학이라 부른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76~138, 재위 177~138)가 죽음을 앞두고 과거를 회상하는 장편소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5현제 중 3번째 황제로, 로마의 황금기 한중간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의 치적은 로마의 영토를 넓히고 로마에 부와 명예를 준다.

작가 마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이 장편소설을 서기 100년 전후의 실제 인물 하드리아누스를 주인공으로, 그의 나이 20~25(1924년에서 1929년 사이)에 쓴다. 작가는 마치 하드리아누스인 양(독자로 하여금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하드리아누스의 음조로 서사를 풀어간다. 80세를 넘긴 하드리아누스의 사상과 성찰하는 마음, 자연과 예술을 지향하는 시선이 농밀하다. 작가의 나이가 20대라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수많은 사료를 읽고 현지를 답사하더라도, 80세 정도 노인(혹은 황제)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을 관조하는 실력은 하드리아누스라는 인물을 통해 세세히 전해지는데, 13년 전의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려운 책 한 권을 읽었다는 자부심 하나만으로 족했을 터다. 그런데 13년이 흐른 지금, 나는 이 한 권의 책에 가슴 벅찬 진동을 느낀다. 어렵지만 은근한 재미가 소설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는 말도 덧붙인다.

 

 

책의 서두는 사랑하는 마르쿠스, 손자 마르쿠스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당시 마르쿠스는 17세로, 후일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혈연의 손자가 아니라 안토니누스의 조카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맞은 후, 자신이 사망하면 황제에 즉위하도록 해놓고, 대신에 안토니누스의 조카 마르쿠스를 양자로 삼아 후일의 황제로 삼으라고 명령한다.

당시 로마 제국은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계승시키는 게 아니라, 두 명의 양자를 택해 군주가 되는 훈련을 거치게 한 후, 황제가 죽으면 그 양자 중 한 명이 황제가 되는 것을 규칙으로 삼는다. 양자 둘 중 하나가 사망하거나 황제로서의 자질이 부족할 것을 대비한 제도이다. 하드리아누스 역시 16세 때 두 명의 양자 중 하나로 택함을 받는다. 그런 후 군에서 15년을 복무하고 양자로 택함을 받은 지 20년이 되어서야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철저한 군인이자 정치가이며, “나의 최초의 조국들은 책들이었다”(42)고 말할 정도로 지독한 독서가이다. 그는 군인으로서 아시아 여러 국가를 점령하는 데에 직접 전투를 하고, 자신을 모함하거나 죽이려는 술수를 겪어내며 황제의 훈련을 받는다. 그때 본 풍경과 사람과의 관계, 정치적 술수는, 하드리아누스를 한층 성숙시키며 황제이자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성찰을 돕는다.

그는 황제가 된 후에도 야전사령관으로 전투에 참전하며, 점령국가에 도로와 건물을 건설한다. “권좌를 지킨 20년 동안, 나는 12년을 정착된 주거지 없이 지냈다. (중략) 가벼운 천막이, 천과 끈의 그 건축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였다. (중략) 그러나 지나치게 정착하지 않으려 경계했다”(133) 이 대목만 보더라도 그가 자신을 다스리기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건축에 있어서도 대단히 철학적인 사고를 보인다. “나는 많이 재건축했다. 그것은 시간과 더불어 시간의 과거 양상 아래 합작하는 것, 시간을 포착하거나 혹은 시간의 정신을 변모시키는 것, 시간이 보다 먼 미래를 향해 가는 데에 역참의 역할을 제공하는 것이다”(138)

 

 

그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로마의 점령국이 되었지만, 건설에 저항하는 유태인들이 전쟁에 버금가는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이에 하드리아누스는 노구임에도 친히 이스라엘로 가 협상도 해보고(그는 대단한 협상가였다) 유태인을 영입해 투쟁을 종식시키려 한다. 그런 와중에 병을 얻어 귀국하게 되고 마침내 임종을 앞둔다.

임종의 침상에서 그는 육체의 고통에 시달려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주치의는 독극물을 달라는 황제의 명을 어기지 못해 자살을 하고, 하드리아누스는 자신 때문에 죽음을 택한 주치의에 형언할 수 없는 가책을 느낀다. 이에 하드리아누스는 자살의 꿈을 거두고 다시 삶의 의욕을 찾아 황제로서 마지막 업무를 수행한다.

그러기 전, 그는 철학자 유프라테스에게 자살 허가를 내렸었다.(중략)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 유용하기를 그칠지, 그 순간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287) 고 했다. 죽음에 관한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죽음의 침상에서 냉철하게 자신을 바라본다. “내가 영혼을 하나 소유하고 있다면, 이 영혼은 환영들과 동일한 물질로 만들어졌다. (중략) 죽음에 관한 명상이 죽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중략) 죽음도 삶과 똑같이 이 포착할 수 없는 모호한 재료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299)

그가 생전에 품었던 생각 혹은 시행했던 치적은 지금 봐도 대단히 선구적이다. “노예를 매춘업자들이나 검투사 양성소에 파는 것을 금지했다”(126)거나, “어떤 처녀도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결혼에 강요되지 않도록 강조했다(128)”거나, “우리 황제들은 국가의 공무원이다”(132)라는 대목이 그렇다.

당시 황제가 되면 신으로 추앙 받아(“내가 원했건 말았건 상관없이, 제국의 동방 민족들은 나를 신으로 취급했다.158) 로마든 점령국이든 많은 신전과 조각상이 건립되던 것을 보면 파격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그가 공무원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국민이 원하는 신의 자격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한다. 권력에 대한 열망, 그에 따른 책임을 적절히 분배하며 황제의 자리를 지켰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황제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이기도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나의 미덕들을 사용했고, 나의 악덕을 이용했다”(265)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 중 하나가 동성애다. 그는 미소년 안티노우스를 사랑했는데, 그에 관한 묘사는 그 어떤 연정의 고백보다 강렬하며 문학적이다. “몽상으로 자주 내려뜨고 있던 눈이 치뜰리고, 세상에서 가장 주의 깊은 시선으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166) “머리채 아래 숙인 머리, 길게 드리운 눈시울로 비스듬해 보이는 두 눈, 널찍하고 누운 듯한 젊은 얼굴”(167) “재스민의 피부를 벌꿀색깔로 바꾸어 놓았다. 망아지 모양으로 약간 묵직했던 다리는 길어지고, 볼은 부드러운 아잇적 볼록함을 잃고 튀어나온 광대뼈 아래로 약간 패었다. 경기장을 뛰는 젊은 육상선수의 공기로 부풀은 흉부는 박쿠스 여사제의 목덜미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곡선을 갖추게 되었다. 입술의 뾰로통 정열적인 쓰라림을, 슬픈 포만감을 담고 있었다. 사실, 이 얼굴은 마치 내가 밤낮으로 깎고 다듬기라도 했듯이 변했다.”(167)

이 미소년은 하드리아누스와 어디든 동행했으며, 20세가 되자 미소년 때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두려워해 자살한다. 역사적으로 이 죽음은 자살이다 익사다 불분명하지만, 이 소설에선 스스로 개펄에 빠져 죽는 것으로 나온다.

하드리아누스는 연인을 잃자 오랜 기간 비통함에 빠진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 전역에 그의 신전을 세우고, 죽은 지점 근처에 안티노오폴리스라는 이름의 시를 건설한다. 안티노우스를 묘사한 조각상을 여기저기에 만들어 두기도 한다. , 황제와도 같은 신적인 존재로 격상시킨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해부학 연구도 한다. “영혼과 육체가 서로 뒤섞이는 이 중간 영역에, 꿈이 현실에 대답하기도 하고 때때로 현실을 앞서가는 그 중간 영역에 관한 호기심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194) 그러면서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이 연소를 복구하는 일이 가능할까?”(195) 라고 자문해보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기원 전 혹은 기원 후 얼마가 안 된 시점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생각이 깊지 못할 것이라 여기지만 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한다. 종교관에서도 이를 드러낸다. “나는 다른 사람을 자기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라는 교훈에 관해 하루저녁을 내내 그와 토론하며 보낸 적이 있다. 이 교훈은 인간의 본성과는 너무나 반대적이라 언제나 자기자신밖에 사랑하지 못할 서민 대중이 결코 따를 수 없을 것이었고, 또한 이 교훈은 현자에게는 적합하지 못했으니 현자는 특별히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232) “우리의 지적 훈련의 4분의 3은 허공에다 수놓은 자수에 불과하다”(233)

이 외에도 하드리아누스의 사색의 부피와 질량은 두텁고 깊다.

중재된 싸움은 매번 앞으로 올 싸움을 위한 선례이자 담보였다”107.

선도 악이나 마찬가지로 타성적인 것이라는 것을”107.

평화는 나의 목표였다만, 나의 우상은 아니었다.”107

법규들은 풍속보다 느리게 변한다. 법규가 풍속에 뒤질 때 위험하나, 풍속에 앞장서려 할 땐 더욱 위험하다.”124

한 가지 생각에만 몇 년 동안 파묻히다 보면 거기엔 삶의 온갖 타성이 차츰차츰 배어들게 마련이다.”298

 

 

나는 이토록 방대하고 다양한 철학적 사고가 스민 소설을 접한 적이 없다. 내 안엔 이미 단순한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닌, 벅찬 감동이 진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도 한때는 이러한 소설을 쓰길 원했다. 신라 문무왕이다. 문무왕을 왕이자 인간으로 그리려는 밑그림을 그렸고, 그에 관한 책을 읽었으며, 중국 서안까지 갔다 왔으나 내 실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유르스나르의 이 작품은 내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이런 말을 한다. “황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나는 느낀 때가 있었다. 그때엔 그에게 거짓말하도록 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 모두가 거짓말을 하듯.”(326) “이 인간 삶은, 사람들이 무어라든, 하나의 수평선과 두 개의 수직선으로 구성되지 않고, 세 개의 구불거리는(선이 라는 말이 빠진 듯) 한없이 늘어져, 끊임없이 접근되었다가, 끊임없이 갈라서는 세 선으로 구성되고 있다. 한 남자가 자신이라고 믿었던 자기, 되고자 원했던 자기, 그리고 실제 자신이었던 자기“(327)

작가노트의 말이 타종의 여운처럼 내 마음에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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