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에 이어 『이별의 푸가』를 읽는다. 그는 2018년 8월에 소천 했다. 이미 세상과의 이별을 감지했던 걸까. 이 책에서 김진영은 연인과의 사랑을 빗대어 ‘이별’에 관한 생각을 담담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서술한다. ‘푸가’를 찾아보니, 음악 형식이 아니라 작곡 형식이라고 한다. 나로선 어떤 게 푸가인지 잘 모른다. 책 표지엔 『이별의 푸가』를 ‘일기 형식’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일기도 에세이도 아니다. 굳이 말하면 에세이에 소설적 요소를 섞은, 탈형식의 글이 아닌가 싶다. 글에 있어 장르가 뭐 그리 대단할까. 어떤 글이든 ‘장르’로 구분하는 짓은 거북하다. 글은 그저 글일 뿐이다.
김진영은 주로 베냐민과 프루스트, 바르트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곁들인다.
“프루스트는 켈트족의 전설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사랑했지만 죽은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되어 우리 주변 곳곳에서 함께 산다고.”
그런 다음 자신의 말을 한다.
“사랑이란 뭘까? 그건 자기도 모르게 내가 그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그 사람이 나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일이다. 서로가 서로의 몸속에서 하나의 장기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떠나도 내 몸의 장기가 된 사람은 여전히 내 배 속에 남는다. 그 사람은 사랑이 끝났어도 나의 타인이 아니다. 내 몸속에서 살아가는 장기, 숨 쉴 때마다, 먹을 때마다 내 몸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내 유기체의 한 부분이므로, 추억의 습격이 적중하는 지점은 이 지점이다. 매듭이 맺어지는 장소는 바로 이 장기이다. 습격당하는 아픔, 그건 몸속에서 장기가 꼬이는 아픔이다. 그때 나는 바르트를 이해한다. ”나는 그 사람이 아파요.“(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참으로 애절하다.
그래 그런가. 나는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순간 불타오르는 열기가 사랑이고, 그때와 같은 색, 같은 농도로 지속될 수는 없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지속된다고 믿어도, 그 사랑엔 여러 요소와 조건이 섞여 생활이 되고 권태가 된다. 여기서 ‘이별’이 탄생한다.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있어도 ‘부재’가 존재하는 사랑. 그것은 이별이며 타인이다. 김진영이 말하는 이별은 이러한 이별이며(물론 몸의 헤어짐도 포함한다), 그 이별은 절절하다. 타자로 전락하고야마는 사랑은 우리 인간에겐 ‘어찌해 볼 수 없는’ 아픔이자 소외이다. 김진영은 “사랑이 끝났어도 나의 타인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결국 ‘내 장기’가 되어 나를 아프게 한다. 부재가 주는 이별의 아픔.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부재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김진영도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결국 끝나고 만다. 그 끝남의 운명은 아무리 뜨겁고 진실한 사랑이라도 배신과 패배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이별이란 무엇일까. 이별은 이중적이다. 이별은 사랑이 패배와 배신으로 건너가는 분기점이다. 그러나 이별은 동시에 사랑이 그 운명으로부터 구원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때 이별의 주체는 태어난다.”
사랑과 이별의 성찰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헌데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마다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어찌해 볼 수 없는’ 힘에 끌려 ‘사랑하고야마는’ 것은 아닐까. 그것 또한 우리 인간에게 선포된 운명의 유전자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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