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이 없어 뭘 먹을까 하다 갑오징어 철판 볶음을 먹기로 한다.
두꺼운 철판엔 갑오징어가 시뻘건 양념 옷을 입고 늠름하게 누워 있다.
갑오징어 하면, 작은언니가 생각난다.
지금은 갑오징어가 귀해 비싸지만, 당시엔 갑오징어가 오징어보다 쌌다.
그때 언니의 살림은 팍팍했다. 그런데도 나는 뻑하면 언니네로 가 밥을 먹었다. 남자친구랑 데이트를 하다가도 불쑥 찾아가 저녁을 얻어먹은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철딱서니철딱서니철딱서니....
아무튼, 내가 언니한테 가면 언니는 갑오징어로 볶음을 해 상에 올리곤 했다. 가지나물이며 콩나물이며, 또 무슨 반찬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의 밥상은 정성이 듬뿍 담겼고 엄청 정갈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언니의 밥상은 정성 그 자체로 정갈하다. 나는 형부에게 말했다. “형부는 참 복 받았어요. 이렇게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리는 마눌은 없을 거예요.” 형부는 픽 웃으며,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얘기한다고 믿는 눈치였다. 에이, 복도 모르는 형부 같으니라고.
엄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나와 작은언니는 한 달에 한 번 엄마 아버지를 찾아갔다. 엄마는 딸들이 온다고 밥상을 차려 내오신다. 갈비탕에 갈비찜, 게장, 생선구이 등. 내 눈엔 메뉴가 참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느끼한 것들이 있으면 느끼함을 잡아주는 매콤한 뭔가가 있어야 할 텐데, 엄마는 좌우간 좋다는 음식을 몽땅 먹이고 싶어 했던 듯하다. 내가 밥상 앞에 앉으면 엄마는 “많이 먹어라” 소리를 많이도 하신다. “왜 그렇게 조금 먹니, 더 먹어라, 더 먹어” 소리도 빼놓지 않는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자식 입에 하나라도 더 들어가는 게 엄마의 행복이라는 걸. 그런 점에서 나는 엄마를 무지하게 괴롭힌 왕싸가지다.
중학교 때다. 엄마는 부엌에서 오빠와 내 도시락 싸 마루에 놓는다. 도시락에서 김이 몽실몽실 오른다. 나는 운동화를 신으며 도시락 반찬을 흘깃 돌아본다. 반찬이 영 아니다. 나는 암말도 안 하고 도시락을 놔둔 채 학교로 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나를 붙잡고 말한다. “잊어버리고 도시락을 놓고 갔더라. 점심을 굶었을 텐데 얼마나 배가 고프겠니. 니가 굶고 있다고 생각하니 목구멍으로 밥이 안 넘어가더라.” 나는 살짝 양심이 찔린다. 도시락 대신 매점에서 빵을 사먹었지롱.
그 후에도 나는 도시락 반찬이 맘에 들지 않으면 김이 몽실몽실 오르는 도시락을 그대로 두고 쌩 학교로 갔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엄마는 도시락을 잊고 간 게 아니라, 반찬이 맘에 들지 않아 놓고 갔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부터 엄마는 도시락 반찬을 내게 점검 받았다. 나쁜 딸년 같으니라고.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못해 눈물이 난다.
작은언니와 내가 엄마한테 가는 날이면, 엄마는 우리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 아파트 주차장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시곤 한다. 우리가 가면 또 주차장까지 따라 나와 차가 정문을 빠져나갈 때까지 종종종 차를 뒤따라오신다. 에구, 엄마야, 제발 그만 좀 들어가라. 우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잖아.
이제 나는 작은언니가 되고 엄마가 되어 있다.
아들이 오는 날이면 주방을 싫어나는 데도 불구하는 이것저것 장을 봐서 하루 종일, 아니 전날부터 반찬을 준비한다. 먹여 보내는 것만으로는 섭섭하니 싸 줄 음식까지 한다.
아들이 사는 집과는 불과 30분 거리. 아들은 출발 전에 반드시 전화해서 도착시간을 알린다. 차가 막혀 5분이라도 늦겠다 싶으면 또 전화한다. 그럼에도 나는 거실 창을 열고 외부 차량 진입 차단기를 내려다본다. 차 번호가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차 엠블럼과 색을 눈여겨본다. 기다림이 답답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간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차단기 앞으로 가 서성인다. 아들 차는 오지 않는다. 집으로 들어간다. 아들이 와 있다. 에고야,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사이에 왔나보네. 아들은 말한다. “엄마도 외할머니랑 똑같네.” ㅋㅋㅋ 내가 그런가? 그리 됐나? 엄마가 무지무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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