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조금은 슬퍼도 살아볼만 한 집

유리벙커 2024. 2. 18. 16:45

지인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부활을 믿고 한 분은 윤회를 믿습니다.

그 분들과 통화를 하다 보면 간혹 종교 얘기가 나옵니다.

신앙과 종교에 관해 생각하게 된 계기입니다.

신앙 혹은 종교에 관한 발언은 분쟁을 일으키기에 딱 좋은 소재입니다.

금기의 영역에 포함시켜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름 떠오른 생각에 입을 뗍니다.

 

먼저, 부활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삼일 후, 예수는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의미심장하게도, 거기까지입니다.

예수가 부활 후 어떤 일에 종사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결혼은 했는지, 자식은 낳았는지, 예수에 관한 구체적인 행적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는 신이 됩니다.

신은, 사람들처럼 일자리에 종사하거나 무엇을 먹거나 배설하거나, 그러지 않아야 신이 됩니다. 신은 초월적 존재로 절대성과 완전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해서, 부활한 예수의 다음 행적은 나오지 않고, 나와서도 안 되고, 나올 수도 없습니다. 의미심장하다고 말한 까닭입니다.

이 시점에서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인간은 부실하고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원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기까지,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한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신으로 추앙한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종교는 없어져도 신앙심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윤회에 관한 지인의 말을 옮겨봅니다.

지인은, 남편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고, 그것을 꿈으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꿈이라고는 하지만 직접 본 듯 확신에 차 있었고,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과 윤회를 믿는 것이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이쯤해서 이런 생각이 납니다.

한 번 살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부활하거나 다시 태어나는 게 뭐 그리 좋을까.

삶을 중심에 두면 죽음을 부정하게 됩니다.

기실, 삶이 중심이라면 죽음도 중심에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두 개의 축이 하나가 된 사람의 몸입니다. 몸은 그 사람만의 집입니다. ‘사람이라는 집은 살아있을 때에라야 가치가 있습니다. 해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부정의 대상으로, 삶을 영원한 가치로 못 박기를 합니다.

헌데 이 사람의 집’, 즉 생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죽음이 두려운 존재가 되고 맙니다.

당장 몸이 아프면 죽을 것처럼 겁부터 납니다. 온갖 영양제를 찾아 먹고 몸에 좋다는 무엇무엇을, 어느 병원의 어느 의사가 잘 고친다더라, 누구는 무엇을 먹고 암을 이겨냈다더라, 등등의 정보를 얻고 시간과 돈을 씁니다.

한편 우리의 몸에는 우리가 어째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축, 즉 죽음의 축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는 생의 축이 하도 커 죽음의 축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생의 성장이 지속될수록 죽음의 성장은 커지게 마련입니다.

생의 축과 나란한 죽음의 축을 누가 거역할 수 있을까요.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생의 축과 나란한 게 죽음의 축이라고 보여주려던 건 아닐까요. 석가모니의 열반도 생의 축과 동등한 게 죽음의 축이라고 말하려던 건 아닐까요.

예수나 석가모니를 종교화 한 것은, 예수나 석가모니가 죽은 후의 일이니 해석하기 나름일 것입니다.

 

사람의 몸인 집이 조금은 슬픕니다. 얼마쯤은 기뻐했고, 또 얼마쯤은 좌절하거나 들떠했고, 또 얼마쯤은 고통스러워했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살아볼만 한 집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하릴없이 들기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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