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천변의 시간

유리벙커 2011. 6. 9. 19:21

 


자투리 시간이라는 게 있다.

작심하고 뭔가를 하기엔 부족하고 그렇다고 맘 편히 쉬기에도 어정쩡하다.

그러나 고마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쫓기듯 살아온 때를 돌아보기도 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정리하기에도 적당하다.

요즘이 바로 그 때이다.

그런데 이 시간이 버겁기만 하다.

거의 글만 잡고 살다, 글을 놓으니 할 일이 없다.

실직자들이 이럴까.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 끝에 컴퓨터에 지저분하게 깔린 글이며 사진을 정리한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나니 또 할 일이 없다.

오랜만에 천변으로 산책을 나가기로 한다.

작년만 해도 꽤 산책을 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스스로에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미뤘다.

움직이는 게 싫어서이다.

오늘은 해도 없고 바람도 살짝 부는 게 산책하기엔 그만이다.

오전부터 산책을 별렀지만 결국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집을 나선다.


산책할 때면 으레 아이팟을 챙겼지만 오늘은 그냥 나간다.

세상의 모든 소리, 다 듣고 싶다.

심지어 그렇게 싫어하던 찻소리까지 귀담아 들으려 작정한다.

좋은 것만 담길 원했던 나를 반성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천변 산책로로 통한 아파트 철책엔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누구든 저렇게 피어보길 원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더 많이, 더 크게, 그러한 욕심 때문에 만개한 자신을 보지 못했을 뿐

누구에도 저러한 시절은 있었을 터이다.  

내게도 있긴 있었을 것인데 나 역시 그랬던, 혹은 그러한 나를 보지 못한다.

욕심의 철책이 단단했다.

잠자리 한 마리 앉을 수 없게 빡빡했다.

이 자투리 시간마저 그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고 뭔가 생산적인 것에 쓰려고 하니 안 그런가?

디카를 챙겨 나온 것만 봐도 그렇다.

행여 소설에 쓸 자료가 있으면 담아오고자 함이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는 한가하다.

바람도 얌전하고 하늘도 음전하다.

모든 게 조용한데 내 속은 공사로 한창이다.

저 풀이름은 뭘까, 저 꽃 이름은 뭘까, 소설에 썼던 꽃 대신 저걸로 바꿀까?

그런데 쟤네들 이름은 뭐지? 아무튼 사진으로 담아나 보자.

 

 

자투리 시간과 계절의 싱그러움조차 내겐 하나의 밑 작업에 불과해진다.

시간에 여유를 주는 것이 이렇게 인색할 수가 없다.   

이러한 나를 탓해보지만 방법을 모른다.

마음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방법.

문득, 오늘의 산책은 나를 가만히 내려놔야 한다는 충고이며 연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정리하는 것 또한 욕심이다.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죄라는, 내가 정한 율법에 대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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