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관광객 아닌 관광객

유리벙커 2024. 12. 30. 18:47

거제도에서 산 지 4년이 다 돼 간다.

문서상 거제도 주민이긴 한데 정서상 거제도 주민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 점은 인정한다.

특히 재래시장에 가면 나는 그저 관광객일 뿐이다.

재래시장에서 생선을 살 때면 나는 생물인지 해동인지 묻는 버릇이 있다.

마트에는 생물과 해동을 정확하게 쓴 라벨이 붙어 있지만

재래시장 좌판엔 싱싱해 보여도 해동일 때가 종종 있어서다.

한 번은 통영 어시장에서 제법 큰 병어가 있어서 생물인지 해동인지 물었다.

당차게 생긴 생선가게 여주인은, 당차게도 생물이라고 대답했다.

집에 와 구워먹는데 냄새도 살짝 나고 생선살도 보드랍지 않고 단단했다.

이런 삽화를 굳이 관광객으로 보느냐 마느냐로 엮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거제나 통영이 관광도시다 보니, 뜨내기 관광객쯤으로 봤을 일을 얘기하는 거다.

이 삽화는 약과다.

관광객 아닌 관광객이 된 삽화 두 개가 더 있다. 하나는 쎈, 정말 쎈 삽화다.

 

재래시장에 가면 길가나 시장 귀퉁이에 푸성귀를 늘어놓고 파는 할머니들이 있다.

이번에도 통영 재래시장에 갔을 때다.

오목한 플라스틱 그릇에 시금치를 얹어놓고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나는 가격을 묻고 한 바구니를 달라고 한다.

그 말끝에 나는 조금 더 주심 안 돼요?”라고 말한다.

시금치 값이 비싸던 때라 그랬을 수도 있고, 재래시장이니까 덤을 달라는 말을 해도 괜찮겠지 싶은, 나름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헌데 할머니는 비닐봉투에 시금치를 쏟으며 이런 말을 한다.

놀러왔으면서 더 달라고 하네.”

~~~ 관광객이면 돈이나 쓰지 뭘 더 달라냐는 뜻이다.

 

이번엔 쎈 삽화로 들어간다. 내 멘탈이 흔들린 사건이다.

11월 언제쯤이다.

성포 어판장 근처에 있는 우체국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갑자기 홍합 미역국이 생각났다.

어판장을 기웃대며 홍합이 있나 본다.

어판장에 딸린 가게들은 경매로 받은 생선을, 주로 횟감을 판다.

별로 돈이 되지 않는 홍합은 딱 한 군데 있었다.

내가 홍합에 관심을 보이자 가게 주인은 마뜩찮은 목소리로 뭘 사려느냐고 묻는다.

다분히 시비조다.

그럼에도 나는 홍합을 사겠다고, 가격을 묻는다.

생각보다 비싸다.

지금이 홍합 철인데 가격이 좀 나가네요,” 라고 말했더니

가게 주인 왈, “끝물이에요.”라고 퉁명스레 대꾸한다.

가게 주인의 말투가 영 거슬린다.

안사면 될 터인데 이번에도 나는 빙신같이 저쪽에 있는 걸로 담아주세요.”라고 말한다.

어떤 바구니에 있는 건 씨알도 싱싱함도 덜 한 듯했고,

내가 가리킨 바구니에 있는 건 호스에서 바닷물을 계속 공급받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내가 가리킨 바구니를 번쩍 들더니

됫박에 든 쌀을 손 밑동으로 싹 갈겨 쓸어내리는 것과 똑같은 포즈로

바구니에 든 홍합을 싹 쓸어 반을 만든다.

나는 뭐지? 왜 저러지? 그런 생각이 스치는데,

가게 주인은 이렇게 주는 것도 내 맘이고!!!” 소리 지르듯 말하더니

이번엔 바닷물을 공급받고 있는 커다란 고무다라에서 홍합을 잔뜩 꺼내 얹더니 이렇게 더 주는 것도 내 맘입니다!!!”라고 큰소리를 낸다.

뭐가 어째? 머리꼭지가 확 돈다.

갑질도 제대로 해라, 그것도 권력이라고.... 그런 생각이 확확 나는데

나는 겨우 한다는 말이 안 사욧!”하고 쌩 몸을 돌린다.

..... 돌아서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어디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본데 그 분풀이를 왜 내게?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고 가격을 깎은 것도 아니고 더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차로 돌아와 검색을 한다. 홍합은 11월부터 겨울 동안 제철이라고 나온다.

씨씨씨씨... 씩씩거리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난다.

성포 어판장 뒤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펜션이며 숙소가 있다.

관광객들은 횟감을 사서 숙소에서 회로 먹거나 매운탕을 해먹는다.

(우리집에 온 손님들도 성포 어판장 뒤에 숙소를 얻어 그렇게 해먹었다.)

홍합을 팔던 가게 주인은 내가 관광객인데 횟감이 아니라 돈도 되지 않는 홍합을 사서 화가 난 모양이다.

짐작컨대, 가게 주인은 내가 거제 주민이며, 성포와 같은 면에 사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역사회의 특성이기도 하다.

 

나는 재래시장에 거부감을 갖지 않지만 지금은 거부감이 든다.

어우, 이런 말을 늘어놓자니 슬슬 짜증이 난다.

커피나 한 잔 뽑아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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