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굿바이 거제

유리벙커 2025. 2. 18. 18:34

거제살이 4년을 마치고 살던 집으로 갑니다.

굳이 거제를 택해 몸을 부린 건,

연고가 없고 풍경이 좋아서였습니다.

거제는 대단히 매력적인 선택지였습니다.

젊어서는 살고 싶은 데를 정해 이사도 참 많이 다녔지만

지금은 그런 낭만적인 현실이 아닙니다.

이사에 따른 비용지불이 꽤 되고,

큰 것부터 자질구레한 모든 것을 예약해야만 이사가 가능합니다.

거제에선 세입자로 살고, 살던 집엔 세입자가 있습니다.

거제 집과 살던 집의 이삿날을 맞추기가 꽤나 어렵습니다.

신경이 과부하를 일으켜 체력 소모가 장난 아닙니다.

오래 된 친구는 말합니다.

거제로 간 거, 후회하지 않니?”

후회라니요, 천만에요.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고 대답합니다.

 

바다와 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집을 구한 건 행운입니다.

하루 날을 잡아 거제에 와서 집을 보러 다녔습니다.

집 세 채를 봤지만 아니었고, 날도 저물어 집으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노노선생(거부권을 잘 행사하는 남편인지라)

딱 한 군데만 더 보자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본 집이 지금 살고 있는 언덕 위의 집입니다.

주방엔 커다란 창이 있어 설거지를 할 때면 바다와 갈매기가 보입니다.

거실에선 앞산이 보입니다.

봄이 되면 연두색 산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벚꽃도 화사하게 핍니다.

탄력적인 뻐꾸기 울음소리도 듣습니다.

원하고 원하던 이런 집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마트에서 공산품을 사듯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습니다.

 

거제에서 자발적 고립을 즐겼습니다.

바다는 물론 둔덕과 그 너머와 능선을 많이도 좋아했습니다.

거제에서 물러나려는 때가 다가옵니다.

야금야금 이삿짐을 정리합니다.

즐기고 좋아했던 것들이 나를 채웠나 싶은데

돌아보니 그건 아닙니다.

여행 욕구가 사라진 건 맞지만 거제는 여전히 갈증으로 남습니다.

 

나와는 달리 노노선생은 취미생활을 하며 지인을 만들었습니다.

노노선생의 지인들은 밭에서 막 소출한 양파며 배추, 대파, 쪽파, 상추, 당근 등속을 보내옵니다.

야채를 보고 가슴이 뭉클한 적은 처음입니다.

배춧잎 하나하나에, 쪽파 하나하나에, 정성이 듬뿍 든 게 눈에 보입니다.

정성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거제를 떠나도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은 가슴의 어느 방에 간직될 듯합니다.

 

거제로 올 때만해도 거제에 뼈를 묻을 줄 알았습니다.

헌데 다시 이사를 합니다.

4년 간 몸이 세월을 먹었습니다.

병원 치레가 잦아집니다.

의료시스템은 거제보다는 살던 데가 좋습니다.

살던 데는 유년기와 학창시절과 젊음과 반항, 설렘과 기쁨과 좌절이 녹아있습니다.

그 어느 지점엔 저의 세포 몇 조각도 떨어져 밟히거나 바람에 날렸을 터입니다.

거기, 고향이 그립습니다.

이사를 하면 광화문과 경복궁, 창경궁, 인사동을 가보려고 합니다.

내 집처럼 뻔질나게 돌아다니던 곳이 이토록 진심일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 주면

굿바이 거제를 해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리고 미련이 남습니다.

살던 집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살짝 들뜨기도 합니다.

시소에 양발을 올려놓고 이쪽 발과 저쪽 발을 번갈아 밟는 기분입니다.

 

잘 있어요, 거제....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은 관절  (0) 2025.02.25
관광객 아닌 관광객  (0) 2024.12.30
합천박물관과 해인사를 다녀오다  (1) 2024.04.13
해변 너머 저기  (0) 2024.04.02
조금은 슬퍼도 살아볼만 한 집  (1) 2024.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