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할 때 맛보라는 듯, 슬쩍 내리다 말다 하던 비가 그쳤다.
하늘은 가벼운 잿빛이고 바람은 옅은 흥분을 담고 있다.
참으로 매혹적인 날씨가 아닐 수 없다.
물레의 바늘에 찔린 공주가 반쯤 눈을 뜨고 생각에 잠긴 날씨이며,
독사과를 품어야했던 질투가 시를 읽는 날씨이다.
작은 꽃무늬가 있는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대관령 양떼 목장으로 간다.
언제부터인가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푸른 초원, 그 위를 뭉게구름 같은 털을 단 양떼가 한가로이 머물 것 같은 그 장소,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처럼 내 안을 떠돌았다.
왜 그랬을까.
위안이 필요했던가보다.
각이 없고 모가 없는, 둥글고 부드러운 선만이 있는 그 무엇이 꼭 필요한 영양소처럼 절실했던 건지도 모른다.
양들은 절실해 보이지 않았다.
사진에서처럼, 영화에서처럼, 양들은 둥근 선으로 그저 그렇게, 무심해보였다.
무관심과 너무나도 닮은 무심함.
무심함을 찾아왔으면서도 나는 양에 차지 않는 어떤 것을 느꼈다.
양에 차지 않는 어떤 것이란 어떤 것일까.
무엇을 원했기에 나는 이리 헛헛할까.
바람이 작은 몸짓으로 양떼와 논다.
양떼는 더없는 자연으로 자연과 논다.
그것들에 사람은 들어있지 않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 숨어있던 은유도,
‘희생양’이라는 말도 들어있지 않다.
그렇게, 하나로 엮이지 않는 생각을 하며 나는 양떼가 있던 초원을 한 바퀴 돈 후 체험관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체험관은 우리에 양떼를 가둔 곳으로, 관광객이 양떼에게 직접 건초를 주는 곳이다.
우리 안의 양떼는 새끼인 것도 있고 늙은 것도 있다.
건초 한 바구니를 받아 양떼 앞으로 간다.
양들은 더럽고 털이 뭉쳐있다.
그러나 눈빛은 선량, 선량하다.
왜 ‘희생양’이라는 말이 나왔는지 실감한다.
건초를 양에게 준다.
양은 맛있게, 아주 맛있게 건초를 먹는다.
죽기 위해 먹어야 하는 건 비록 양들만은 아닐 터.
건초를 먹는 양에게 작은 소리로 말한다.
“안녕? 맛있니?”
양은 대답하지 않는다.
어쩌면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알아듣지 못했을 뿐.
내가 양에게 말을 건 이유는 아마 건초를 열심히 먹는 모습이 짠해서였을 것이다.
얼마 후면 인간에게 당할 죽음, 그것이 생각나서.
또 ‘희생양’이라는, 양의 입장에선 얼토당토않은 말이 생각나서.
양떼 목장을 나온다.
결국, 양의 생각은 듣지 못했다.
풀풀거리며 날아오르는 연기처럼,
두서없는 내 생각만이 이미 가을바람이 된 바람에 어울리지도 않게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