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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중 『녹턴』과 『남아 있는 나날』을 읽었는데 이번엔 장편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다. 한마디로 최고의 작품이다. 이렇게 섬세하고 작품성이 뛰어난 소설도 드물다. 시종 일관 잔잔한 톤이지만 핵심을 향해 나아가는 그 꾸준함과 성실함은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고도의 경지다. 글을 쓰다보면 머릿속에 든 내러티브나 표현이 자꾸 보채는 까닭에 디테일한 부분을 놓치기 쉬운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하나하나 펜 끝으로 세밀화를 그리듯 쓴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글 전체가 디테일 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은 내공이 탄탄하지 않으면,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없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힘이다. 그런 힘의 또 한 부분은, 화자(주인공 ‘나’)와 청자(독자)와의 거..

그토록 먼 여행

로힌턴 미스트리는 현재 캐나다에 살며 인도 태생의 작가다. 그의 장편소설 『그토록 먼 여행』은 처음 접해보는 인도 소설이다. 인도 소설이라는 점이 적잖게 궁금증과 부담을 준다. 헌데 웬걸. 우리나라 작품을 읽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읽힌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점은 번역에 있다. 손석주의 번역은 그야말로 최고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읽는 내내 번역자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독자의 뇌를 쥐어짜는 게 아니라 편안하면서도 작품의 진가를 자연스레 녹여, 독자와 작품을 하나로 만든다. 원작을 이해하고 작가와 함께 호흡하지 않으면 좋은 번역이 나올 수 없다. 즉,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 없이는 훌륭한 번역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로힌턴 미스트리의 글 솜씨다. 작가의 탁월한 ..

Stand By Me (노래: Ben E King)

거두절미하고, 이 노래만 들으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동창입니다. 그 친구는 예쁘다고 할 순 없지만 지금 생각하면 개성 있는 캐릭터입니다. 봄 소풍 때입니다. 여학생들은 자유 시간을 끝내고 모두 모여 앉습니다. 일종의 장기자랑 순서입니다. 말이 장기자랑이지 노래가 주를 이룹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쟤요~ 쟤요~ 라는 손가락질 추천도 없이 자진해서 나옵니다. 그 친구가 나오자 여학생들은 뜨악해집니다. 그닥 존재감이 없던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 친구와 말을 나눈 적은 없습니다. 그 친구가 마이크를 잡습니다. 선생님이며 같은 학년의 친구들이 일순 조용해집니다. 그 친구는 한 손은 교복 스커트 주머니에 푹 찌르고 한 손은 마이크를 잡고 Stand By Me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나의 이야기 2022.07.27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고운기 시인의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에 나온 ‘시인의 말’은 인상 깊다. 뭐랄까, 웅성거리는 속내를 고운기 시인 특유의 나직하고도 간결한 음성으로 썼다고나 할까. 1987년 1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에 쓴 ‘시인의 말’을 옮겨본다. 기쁨은 때로 두려움을 동반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나만큼이나 소심한 사람은 기쁠 때도 저편의 슬픔을 생각한다. 정작 슬픔 속에선 기쁨의 저편을 노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죄스럽다. 내 아직 어리므로 잘못은 두고두고 고쳐가리라. 2022년 10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개정판에 쓴 시인의 말도 마음에 남는다. 이생에 나는 가을을 좋아했나보다. 가장 철든 계절이 가을이다. 35년여 만에 첫 시집을 다시 내려 유심히 읽어보니 그렇다. 다시 오는 생이 있겠는..

<<바다 건너 샌들>>을 펴내며

열한 편의 단편을 모아 책을 낸다. 소설가가 책을 내는 일은, 작가 자신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이자 검증이기도 하다. 하나의 문장은 물론 토씨 하나, 쉼표와 줄 간격조차 내러티브에 의미를 표하려는 의도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터다. 대충 넘어간다거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사고는 소설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그만큼 소설은 치밀하게 직조된 형식이다. 형식은 형식이되 재미와 감동을 동반한 형식이다. 함부로 책을 낼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바다 건너 샌들』을 냈다. 졸작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어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겸손의 표현으로 졸작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 말처럼 위선적이고 자기 비하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독자 중 누군가, 졸작이라고 말한 작가를 향해 “졸작이라..

나의 소설 2022.05.23

『페스트』의 전언

카뮈가 『페스트』를 발간한 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47년이다. 카뮈야말로 전쟁의 고통을 겪었고, 그로 인한 인간의 파괴를 여실히 느꼈을 터다. 『페스트』는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그 지역에 퍼지기 시작한 페스트와의 투쟁을 그린 것이나, 1,2차 세계대전이 메타포인 것만은 여실하다. 페스트균에 의해 도시는 폐쇄되고 그에 따른 생이별, 도시에 갇힌 감옥살이, 저항과 무기력의 과정은, 전쟁과 페스트균을 동일 선상에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서술자’라는 호칭으로 전개된다. 어느 특정 인물을 주인공으로 정하지 않고 ‘서술자’를 택한 것은, 페스트는 보통의 누구라도 겪을 수 있으며, 겪고 있으며, 누구라도 서술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따라서 ‘서술자’의 입을 통해 바라..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말하는 예술과 현실

토마스 만의 이 작품집은 두께만큼이나 조금은 무겁고 신중하다. 대체로 자전적 성격이 두드러지는데 「토니오 크뢰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는 어려서부터 예술적 기질이 풍부했으나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친구 한스를 이상형으로 여겨 애정을 주나 그에 충족된 반응은 끝내 얻지 못한다.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간단하고 쉽게 비교를 하면, 토니오 크뢰거를 예술과 특수성, 고독과 소외, 비실용성으로 말한다면, 한스는 문명과 현실, 보편성과 인기, 실용성으로 말할 수 있다. 토마스 만은 두 지점을 하나로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음도 자각하며 고통스러워한다. 「마리오와 마술사」는 다른 작품에 비해 수월하며 재미와 흥미를 준다. 주..

소설 <<인간 실격>>과 드라마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드라마 민음사에서 나온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2004년 초판으로 시작해 2021년에는 무려 89쇄를 찍는다. 소설의 무엇이 이토록 많은 독자를 끌여들였을까. 다자이는 1909에 태어나 1948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39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그는 다섯 번 자살을 시도한 끝에 비로소 죽음에 이른다. 그가 죽음에 천착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그의 소설로 유추해 볼 따름이다. 『인간 실격』은 자전적 요소가 짙은 소설이다. ‘서문’으로 시작해 첫 번째 수기, 두 번째 수기, 세 번째 수기, ‘후기’로 이어진다. 서문에서 ‘나’는 사진 석 장을 보는데, 한 장은 열 살 전후의 사내아이이고, 다른 한 장은 교복 차림의 동일인물이고, 마지막 한 장은 나이를 짐작하기..

장날

장날에 맛 들였습니다. 벌써 두 번째 고성 장날에 갔다 왔거든요.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 가면 고성이 나옵니다. 장날만 구경하긴 뭣해서 간 김에 공룡화석지도 가보고 이번엔 소가야의 고분이 있다는 송학동에도 갔댔습니다. 장날 이야기를 할까요. 이번엔 살 것도 별로 없어서 장바구니 한 개만 달랑 들고 시장에 들어섰습니다. 주로 좌판에 늘어놓고 파는 물건들을 둘러보는데, 어쩌면 좋아요. 살 게 자꾸 늘어납니다. 싱싱해서, 싸서, 사는 재미가 마구 붙습니다. 고구마도 사고, 포도도 사고, 마른 오징어며 고등어도 사고, 작은 통배추 묶음도 사고, 통배추를 사니 열무와 쪽파도 사게 됩니다. 장보기가 본격적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럴 바엔 국수라도 먹고 하자 싶어 칼국수 집엘 들어갑니다. 옛날 칼국수를 시킨 후 칼국..

나의 이야기 2021.10.04

『아름다운 단단함』을 발견하다

흔히, 아름답다는 것은 연약하고 고우며 보드라운 이미지를 고정관념으로 내포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만큼이나 진부하기도 하다. 그에 비해 단단하다는 것은 외부/내부로부터의 충격에 견디는 힘의 이미지다. 책 제목은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은유를 품고 있다. 수소원자 2개(H2)와 산소 원자 1개(O1)가 결합하면 물(H2O)이 되는 그런 류는 아닐 테고, 원소의 결합만큼이나 신비로운 것도 없지만 그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은 오길영 교수가 쓴 산문집으로, 세상살이와 문학과 영화, 읽은 책에 관한 글이 편하고 다채롭게 나온다. 머리 싸매고 읽을 필요가 없게 챕터는 짧고 내용은 간결하며, 그런데 던지는 메시지는 날카롭다. 머리맡에 두고 짬이 날 때마다 펼쳐보..

<<손바닥 소설>>을 짚어보며

『설국』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손바닥 소설』은,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음에도, 소설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고, 동화나 전설, 콩트 같기도 한, 애매한 글들이 많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손바닥 소설에 비해 꽤 오래 전에 나온 손바닥 소설이다. 그러니까 가와바타는 오래 전부터 손바닥 소설이라는, 실험적 버전을 구상하고 쓴 셈이다. 과연 소설이 담지하고 있는 구성과 내러티브와 메시지를, 가와바타는 어떻게 원고지 10매에서 15매 정도로 쓸 수 있었을까. 근자에 한국 문단에 나온 몇 편의 손바닥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한마디로 회의적이다. 분량만 짧다고 손바닥 소설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짧은 분량일수록 내용은 충실해야 하며 그만큼 실력이 있어야 한다. 가와바..

『사소한 부탁』의 사소하지 않음에 대하여

황현산 평론가의 『사소한 부탁』은 사소하지 않다. 사소한 일상을 사소하지 않게, 다른 말로 하면 감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나로선 이렇게 고마운 책도 있나 감탄한다. 먹기 아까운 음식은 조금씩, 야금야금 먹듯, 이 책이 그렇다. 옆에 끼고 몇 챕터씩 야금야금 읽는 재미가 고소하다 못해 소중하다. 예를 들어, 에 보면, 오리찜은 두 손을 적셔가며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축제의 음식을 먹는 자는 마땅히 두 손을 적셔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먹는 음식을 우리와 하나 되게 하는 것이며, 우리가 거둔 곡식과 채소, 우리가 잡은 짐승들에게 속죄하는 길이다.” “오리는 내놓고 죽어 우리 손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옷이 젖는 걸 관계하랴. 어찌 속죄가 없이 행복하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자신이 살해한 생명들과 자기가..

스토리 오브 스토리

책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은 얼마나 될까. 거기다 유익한 정보까지 담겨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은 책이겠는가. 간단히 말하면, 『스토리 오브 스토리』는 문학작품을 안내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책 내용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박상준이 강조하는 것은 “문학작품의 시선”이다. 책에 서술된 작가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르는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 작가와 작품을 같이 보아야 하는지 아닌지, 그에 따른 시각과 솔직한 심정이 균형 있게 전개된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국적이 없”으며,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며, “세련되게 잘 만들어진 문화상품”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백 배 만 배 공감한다. 내가 하루키를 읽으며 의문이 들었던 점은,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왜 그토록 억..

<<오늘의 기분>>은 어떠신지요?

‘오늘의 기분’은 ‘오늘의 날씨’를 연상케 한다. 보통은 그렇다. ‘기분’과 ‘날씨’는 어떤 인과관계에 있는지 모르나 내겐 하나의 줄기로 연결된다. 심영의 작가가 쓴 장편소설 『오늘의 기분』은, 김선재 시 「오늘의 기분」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제목은 무척이나 평범하나, 무척이나 평범하지 않다. 평범함 속에 임팩트가 들어 있는, 김선재 작가만의 오롯한 지평이 아닐 수 없다. 이 매력적인 제목 앞에서 내 호기심은 충분히 끓어오른다. 프롤로그의 첫 줄은 “피종수 교수는 그의 연구실 책상에 엎드린 채 숨을 거두었다.”로 시작한다. 서사의 시작은 죽음이다. 어떤 죽음을 말하려는 걸까. 죽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죽은 자는 ‘지식인’의 상징인 교수다. 그것도 연구실 책상에서다. 그러니까 질병도 아니요, 교통사고..

<<언제나 당신이 옳다>>

제목을 읽는 순간, 뭐지? 왜지? 이런 오만한 제목이 다 있나 싶었다. 책장을 열고 내용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야 제목의 의미를 수긍한다. “언제나 당신이 옳다”는 말은, 자신을 잃지 말라는, 숨어 있는 자신을 찾아내라는, 스스로 인생의 주도권을 잡으라는, 격렬한 응원의 의미다. 프랑스의 사상가에 속할 자크 아탈리의 이 책은, 요즘 흔하게 접하는 가짜 인문학 저서가 아니다. 그는 전 세계의 정치와 사회현상을 거론하며, 기업인과 예술가, 정치가 등등이 어떻게 ‘자기 자신 되기’에 성공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영국의 대처 수상을 제외하면 모두 흙수저에서 출발해 ‘자기 자신 되기’에 입문한 사람들이다.) 어째서 우리는 ‘자기 자신 되기’를 해야 하는지, ‘자기 자신 되기’는 왜 그렇게 중요한 ..

'삼식이' 다시 보기

한때 삼식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삼식이는 퇴직한 남자가 집에서 꼬박 세끼를 먹는다는 뜻으로, 웃자고 하는 얘기다. 나는 도덕주의자나 인류애에 몸 바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삼식이라는 용어가 대단히 불편하다. 삼식이는 여자 입장에서 남자를 비하하는 말로, 드러내놓고 비난은 하지 못하겠으니 희화화라도 해서 비난하고 싶은 심리에 근거한다. 무리는 아니다. 여자도 할 말은 많다. 육아를 책임지고, 살림을 하면서, 때론 시어른도 모시고 산다. 그렇게 인생을 다 보내고 이제 좀 쉬려나 했더니 남편이 퇴직을 해서 세끼를 챙기는 입장이 되고 만다. 억울하다면 억울하다. 그러나 남편 입장에서 보면 ‘삼식이’는 테러적 언어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와서 밥이나 축내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

나의 이야기 2020.09.25

사는 건 운전하는 것과 같아야

보편적 미덕엔 폭력이 들어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친구가 곧잘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해서 만나는 게 좋은데, 너는 사람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 그 말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내가 너를 자주 만나고 싶어 하듯, 너도 나를 자주 만나고 싶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인간성이 따뜻한데 사람과 섞이길 안 좋아하는 사람은 인간성이 별로라는 말이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전엔 그런 마인드가 보편적이었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정釘을 맞고, 이 사람 저 사람과 두루두루 어울릴 줄 아는 사람은 인간성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치다. 이 자연스러움이..

나의 이야기 2020.08.28

<<슬픔은 어깨로 운다>>

이재무 시인의 시는 단단하며 부드럽다. 서정성을 흠뻑 뿌리는가 하면,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단호하게 대한다. 그가 말/언어에 대해 쓴 시 두 편은, 말의 소비가 얼마나 허무한지, 때론 주변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지, 혹은 글로 말을 하는 사람들(자신을 포함)이 얼마나 말을 골라서 해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지퍼가 열렸다 해서 몸의 속이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지퍼는 열리기 위해 존재하지만 닫혀 있을 때 더 지퍼답다. 지퍼가 자주 열리는 사람은 몸이 성치 않거나 외로운 사람이다. 입은 몸의 지퍼다. 입은 말의 항문이다. 배설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괄약근을 조여라. ==== 위의 시 두 편이 래디컬했다면, 다음의 시는 우회적이다. 귀는 주장하지 않는다 귀는 우리 몸의 가장 겸손한 기관 귀는 거절을 모른다 차별이..

<<국수>>를 먹으며

『국수』는 이상국 시인이 문학자전으로 쓴 책이다. 그간 7권으로 나온 시집에서 대표작이라 할 만한 시를 추려 책으로 낸 것이고, 시인이 살아온 내력과 사진들, 평론가들이 본 이상국 시의 평론과, 지인 작가들이 본 인간 이상국을 보여주고 있다. 시 전문가도 아닌 내가 이상국 시인의 시를 어떻다 말하긴 어불성설이지만 나름 독자로서 말한다면, 그의 시는 따뜻하고 토속적이다. 우리의 생활과 마음을 꼭 들어맞게 시로 풀어냈으며, 미화시키거나 오버하는 것 없이 솔직하다. 그렇다고 미적 영역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문학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슬픔이 가득하고, 슬픔이 가득하면서도 따뜻하다. 두 선상을 하나로 녹여 시적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이상국 시인만의 실력이 아닐까 한다. 그가 젊은 날 야반도주를..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임헌영 평론가가 2020년에 펴낸 평론집. 이 평론집은 평론집이라는 다소 어렵고 딱딱하다는 편견을 깬, 대단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누구라도 읽을 수 있게 서술 스타일이 참으로 대중적이다. 이 말은 접근하기 쉽다는 뜻인데, 그만큼 내용 면에서도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라는 실감을 준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모르는 세대들, 6.25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나 같은 세대들이 읽으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여러 작가들이 쓴 소설로 당시의 국내 사정과 국제 정세를 까발린다. 당시를 몰랐던 사람들에겐, 일제강점기와 6.25, 그 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이 지배하던 때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한다. 어째서 지금의 정치권이 바뀌기 어려운지, 일제 청산은 왜 해야만 하고 이렇게 더딘지, 우리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