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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는 1930년 장편소설 『레베카』를 출간한다. 지금(2023년)으로부터 93년 전의 작품이다. 세월을 건너 그 시대를 읽는다는 건 대단한 즐거움이다. 환경적 배경은 영국의 대저택 멘덜리이고, 인물적 배경은 귀족과 하층민이다. 인물적 배경을 더 파고 들면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등과 욕망이다. 이 소설은 1인칭으로 서술되는 ‘나’가 멘덜리로 가는 길을 회상하는 걸로 시작한다. ‘나’는 귀부인의 시중을 드는, 하녀는 아니지만 그와 다름없는 신분이다. ‘나’가 시중을 드는 벤호퍼 부인은 몬테카를로 호텔로 휴가를 온다. 그 호텔에서 ‘나’는 드윈터 맥심이라는, 멘덜리 대저택의 귀족을 만난다. 멘덜리 대저택은 그림엽서에 나왔고, ‘나’는 어린 시절 그 그림엽서를 간직했던 터다. 그 으리짜한 귀족은 ..

『고비에서』

시가 무엇이라는 정의는 많다. 내게 시는, 사건과 내면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추상화에 속한다. 다행히, 고운기 시인의 『고비에서』는 조금이나마 사건으로 내면을 유추할 수 있고, 내면으로 사건을 짐작할 수 있는 시들의 집이다. 2023년 6월에 나왔으며 등단 40년 기념 시집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우선 고비 사막이 떠올랐고, 그 다음엔 인생의 굽이진 고비가 떠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은 중의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시들은 고비라는 장소에서 인생의 고비로 넘어가고, 다시 인생의 고비에서 고비 사막이라는 장소로 이동하길 거듭한다. 그러니까 고비 사막은 일종의 내면의 장소인 셈이다. 사막이 척박하긴 해도 생명이 깃들어 있듯, 시인은 암 수술과 치료, 퇴원이라는 사막을 거치면서..

메모지로 사용하다 죄송하여

프린트 한 종이가 거짓말 보태 산더미다. 강의를 들으며 받았음직한 페이퍼와 내가 쓴 소설을 프린트한 종이들이다. 어느 한 날을 정해, 두꺼운 높이로 쌓인 프린트 물을 반으로 잘라 메모지로 사용한다. 메모를 하다 뒷장을 보니 어떤 강의 때 받은 페이퍼다. 재발견의 놀라움이랄까. 누구의 강의였는지 반쪽짜리로는 알 수가 없다. 내용을 읽어보니 철학아카데미 수업 때 교수님한테 받은 듯하다. 누구의 강의였을까. 내용을 다시 찬찬히 읽는다. 짐작컨대, 조광제 교수님의 수업 페이퍼 같다. 전문은 잃어버렸지만 무척이나 소중한 내용이고 교수님께 죄송한 마음이 크다. 반쪽짜리에 쓰인 내용은 이렇다. 뜨겁게 달군 쇠를 두들겨 납작하게 만들고 납작하게 된 쇠판을 다시 달군 뒤 구부려 이중으로 접어 겹치게 하여 또 다시 두들겨..

나의 이야기 2023.07.18

『카메라 루시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는 제목부터 사람을 홀린다. 처음엔 카메라로 루시다라는 여자를 찍어 말하려는 걸까? 참 멋진 제목이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루시다라는 용어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106쪽에 “프리즘을 통과하는 대상을 스케치할 수 있도록 만든 기계 장치의 이름”이라는 문장만 나온다. 그 문장만으론 ‘카메라 루시다’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특별한 프리즘과 거울 또는 현미경 따위를 이용하여 물체의 상을 일시적으로 종이나 화판 위에 비추어 주는 광학 장치”라고 나온다. 광학 장치의 명칭치곤 대단히 문학적이다. 이 책 제목에 끌려 읽고자 했던 때로부터 제법 많은 해가 지났다. 인터넷 서점에선 여전히 절판이었다. (열화당에서 나온 초판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이 작품은 너무나 유명해서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듯한 착각을 준다. 『춘향전』을 읽지 않았지만 읽었다는 착각을 주는 것과 흡사하다. 시간은 많이 흘러 지금은 2023년이다. 1770년대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이 자본의 힘으로 사는 현대에도 통하리라는 생각은 버거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화두는 인간의 기저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임엔 분명하다. 다만, 사랑을 어떤 식으로 행하느냐, 읽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서사는 널리 알려진 대로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약혼자가 있는 로테를 사랑하다 자살했다는 얘기. 당대 이 책을 읽었던 젊은이들에겐 공감대가 컸으리라 짐작한다. 미완의 사랑이 마치 자신과 같아서 베르테르처럼 자살한 사람이 많았다던가. 해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던가. ..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이 단편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선에 수록되어 있다. 1860년 대 배경으로, 당시엔 집에서 출산하는 게 적절하다고 여긴 시절이다. 병원에서 출산하는 건 오십 년 정도 시대를 앞선 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나 할 수 있다. 로저 버튼 부부는 병원에서 출산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는 모두를 경악케 한 기이한 모습이다. 버튼 씨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칠십 대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외양도 그렇지만 태어나자마자 말도 한다. 병원 관계자들은 한시바삐 저 기괴한 생물체를 병원에서 내보내고자 한다. 그때부터 버튼 씨는 곤경에 처한다. 당장 퇴원을 해야 하는데 배내옷이 아니라 양복을 준비해야 한다. 버튼 씨는 허둥지둥 양복을 맞춰 아들에게 입힌 후 집으로 데려온다. 그렇게 노인 아들 벤저민 버튼은 유치원..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기란 만만치 않다. 오래 전 『세월』을 읽다 포기한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댈러웨이 부인』은 꼭 읽어보고 싶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몇몇 책을 구입하려다 절판이어서 도서관을 찾는다. 도서관에서도 역시나 구할 수 없다. 그러던 중 『댈러웨이 부인』이 있어 빌리기로 한다. 버지니아 울프 하면, 의식의 흐름을 좇는 소설로 유명하다. 『댈러웨이 부인』도 역시 그렇다. 서사는 뒤죽박죽, 등장인물들은 다양하게 많다. 헌데 이 책은 장편이면서도 소제목이나 챕터가 없다. 소설 한 권이 통째로 이어진 장편이다. 독자들로선 피곤하고, 심지어 괴로움마저 느낀다. 예컨대, 주인공 댈러웨이 부인이 무엇을 보고 그 장면을 서술하는 와중에, 줄 바꿈도 없이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이 등장하는 식이다. 독..

식물의 비밀

봄이다, 봄. 봄 중에서도 오월의 봄, 너도 봄이고 나도 봄이다. 꽃들도 좋지만 연두와 어린 초록도 좋아한다. 연두와 초록을 보는데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오른다. 식물들은 어째서 다 초록일까. 광합성으로 생명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라는 말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듯한데, 다른 이유가 있길 바라는데, 그게 뭘까. 꽃은 또 어떻고. 초록에 딱 어울릴만한 색이 아닌가. 주로 보색에 가까운 색으로, 인공적으론 흉내 낼 수 없는 색이다. 초록에 하양, 초록에 노랑, 초록에 빨강, 초록에 청보라, 등등. 갈색이나 고동색인 꽃은 본 기억이 없다. 까망의 꽃도 마찬가지. 거기다 꽃술의 색은 다 노랑이다. 어째서일까. 벌레들이 노랑에만 반응하기 때문일까. 생존을 위해서라는 말 말고, 다른 비밀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한다. ..

나의 이야기 2023.05.17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 하나

김진영의 『조용한 날들의 기록』을 읽다 흠칫 멈춘 문장 하나. “다시 아버지 생각. 아버지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모두가 못다 쓴 편지를 남기는 이들이 아닐까.”-157쪽 “아침에 아버지 생각.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168쪽 이 문장에서 나는 꼼짝도 못한 채 있기만 한다. 내게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이고, 엄마는 그냥 엄마였을 뿐이다. 실은, 자식에게 모든 걸 제공하는 희생의 공급자라는, 사회적 관념이 다였다. 엄마 아버지를 하나의 개체로 생각하거나, 인간적 욕망이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시아버지가 생각난다. 시아버진 평생 철도 공무원으로 묵묵히 일하시다 퇴직하신 분이다. 남편에게서 전해들은 말이다. “아버진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

나의 이야기 2023.05.12

혐오에 관한 의문

미용사가 롤로 머리칼을 만다. 롤 위에 펌 약을 바르고 에어볼을 씌운다. 에어볼은 마치 UFO처럼 가운데는 뻥 뚤린 은색의 둥근 판으로, 360도로 천천히 돈다. 흔히 아우라를 형상화시킬 때 볼 수 있는 그런 모양새다. 둥근 판에서 나오는 자외선과 열이 펌의 완성도를 높인다고 한다. 바닥엔 앞서 미용을 하러 왔던 사람들의 것이겠는, 커트했던 머리칼이 군데군데 깔려 있다. 늘 갖던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몸에 붙어 있을 때는 소중하던 머리칼이 머리에서 떨어지면 혐오가 되는 건 왤까. 몸에 붙어 있을 때는 소중하던 손톱, 발톱이 몸에서 분리되면 혐오가 되는 건 왤까. 그 외에도 많다. 인체의 일부였을 때는 ‘없어선 안 되는’ ‘없으면 탈이 난 증거가 되는’ 똥과 오줌, 방귀, 침, 귀지 따위가 몸 밖으로 나..

나의 이야기 2023.05.09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로베르토 볼라뇨의 이 소설은 독특하다. 아니, 소설인가? 하는 의아함이 드는 소설이다. 한마디로 소설의 전형성을 전복시킨 소설이다. 마치 어떤 책을 읽고 줄거리를 소개하는 듯하다. 그만큼 간략하며, 객관적이며, 사실적이다. 소설 특유의 디테일한 표현을 기대했다면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이 소설은 어느 장르에 넣기도 어렵다. 장편소설도 단편소설도 산문도 아니면서, 소설은 소설이다. 그렇다고 소위 ‘손바닥소설’이라고 단정하기엔 미진하다. 각 소설의 분량은 어느 것은 한 페이지, 어느 것은 두어 페이지 정도로 짧다. 그런데 소설의 무게감은 분량과는 다르게 제법 두툼하다. 아마도 작가의 해박한 지식에 더해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독자를 속이는 고도의 기법 때문이 아닐까 한다. 등장인물들은 남미 여러 국가의 ..

늙음에 묻다

늙음의 지표는 사진. 사진의 독자성은 기록. 기록의 힘은 역사성. 해서, 우리는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며 ‘나의 늙음’을 알아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늙음은 늙음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1차 산업이 3차 산업화하면서, 3차 산업이 4차 산업으로 빠르게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몸’에 많은 투자를 한다. 즉, 늙음을 거부한다. 주름과 잡티를 막으려 썬크림을 바르고, 주름과 동안에 좋다는 화장품을 사고, 주름을 없애려 보톡스와 리프팅을 하고, 주름이 그대로 보이는 사진에 포토샵을 이용해 주름살을 다림질한다. 손가락 몇 번 터치하면 육십 대가 십 대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진을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하여, 잘 다림질된 사진은 나이를 초월하고, 그러..

나의 이야기 2023.05.04

달려라 오토바이

거제로 집을 보러 와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주차장이다. 주차장이라기보다 주차 칸이다. 일반 차량의 주차 칸보다 아주 작은 칸이 한쪽 공간에 그어져 있다. 대체 저 작은 칸은 뭘까. 답은 이사를 한 후에야 알았다. 오토바이 전용 주차 칸.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 친절한 아파트네, 오토바이 전용 주차 칸까지 있고. 그렇게 무심히 얼마를 지난 후 차도를 달릴 일이 생긴다. 퇴근 무렵이다. 차량 사이사이로 많은 오토바이가 달리고 있다. 진풍경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오토바이 행렬은 본 적이 없다.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헬멧을 쓰고 아래위 회색 작업복 차림이다. 그제야 거제가 조선소의 도시라는 걸 실감한다. 내가 사는 사곡엔 삼성조선소가, 옥포엔 대우조선소가 있다. 조선소 근처엔 하청업체들이 ..

나의 이야기 2023.04.23

<<조용한 날들의 기록>>

이 책은 ‘철학자 김진영의 마음 일기’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쓴 일기 형식으로 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도 있지만 아포리즘도 있다. 책장을 열자 첫 문장부터 눈을 사로잡는다. “눈이 내리면서 가르쳐주는 것. 고요히 사라지는 법.” ; 이 문장에서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윤리의 한편을 전달받는다. 2월에 쓴 문장. “노예란 누구인가? 그는 혀가 잘린 사람이다.”(롤랑 바르트 ) ; 나를 포함해 바른 말을 해야 할 순간에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존엄한 목소리를 듣는다. 다른 문장. “멜랑콜리는 우울이 아니다. 특별한 정신의 상태다.” ; 흔히 쓰는 우울증, 우울감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받는 느낌이 든다. 생활에서 겪는 솔직한 이야기도 있다. “눈뜨면 나보다 먼저 깨..

창촌항에서 나는

거제는 교량으로 연결된 섬입니다. 항구가 많고 어촌이 많은 건 당연합니다. 어촌 사람들은 바다로 먹고 삽니다. 정직한 직업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살던 사람이 섬사람들의 생존을 알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저 바다가 보기 좋고 바람과 산과 공기가 좋다는 어떤 향유 이상은 되지 못합니다. 마음이 미안해집니다. 오늘은 창촌항에 갔습니다. 여느 항과 너무도 비슷해서 헷갈립니다. 바람이 많이 붑니다. 점퍼 지퍼를 목까지 올린 후 방파제를 걷습니다. 방파제 저쪽은 바다이고, 이쪽은 어촌입니다. 무슨 까닭에선지 걷기를 멈추고 어촌을 바라봅니다. 산자락에 모여 있는 집들 역시 치열한 생존의 자리입니다. 다리가 아픈 것도 모른 채 어촌만 바라봅니다. 문득, 구상 중인 소설의 배경으로 저 어촌을 ..

카테고리 없음 2023.04.18

비오는 날, 서이말등대

4월하고도 14일 금요일입니다. 금세라도 비가 올 듯합니다.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집을 나섭니다. 거제 면사무소에 앞에 이르자 몇 방울의 빗낱이 비칩니다. 하늘은 구름장이 두텁고 바람은 몇 낱의 빗방울처럼 간간이 불다 그치다 합니다. 거제 면사무소에다 주차한 후 근처를 산책하기로 합니다. 우선 거제초등학교로 갑니다. 116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학굡니다. 당시엔 다리가 놓이지 않은 섬이었을 텐데 섬의 학교치곤 규모가 꽤 큽니다. 정문에 들어서자 5공화국 때의 흔적이 오롯이 보입니다. 그때엔 목숨처럼 강조되던 국민교육헌장과 충효라는 글이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많이 아쉽습니다. 역사를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도 역사 나름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들이 하교합니다. 소중한 미래들입니다..

나의 이야기 2023.04.18

빨래 놀이 좀 할게요

오늘의 날씨는? 흐림. 딱 으등크리 우리 아버지 같은 날씨. 우리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대체로 찌부둥한 편이다. 툭하면 태권도 도복 띠처럼 생긴 끈을 이마에 꽉 동이곤 세상의 근심을 쓸어 담고 있는 듯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버지 저기압이다.”라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듯 경고성 발언을 날린다.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에게 발뒤꿈치를 들고 다니라고 한다든지,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대곤 “쉿!” 하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언니 둘은 “에그, 으등크리 우리 아버지.”라고 속닥댄다. 짐작컨대, 으등크리라는 말은 충청도 사투리다. 나는 저기압도 싫고 발뒤꿈치도 싫다. 집안 분위기가 납덩어리에 눌린 꼴도 숨이 막힌다. 조용히, 군주의 비위를 맞추는 듯한 행위는 강제노역이 따로 없다. 그때부터였으리라. 나는 엄..

나의 이야기 2023.04.12

그래서 바위는 바위

‘언제나 거제’라는 말을 쓸 수 있는 데를 말하라면, 서슴없이 신선대와 선자산을 꼽는다. 언제 어느 때 가도 좋은 곳, 편안함과 경이로움을 주는 곳. 기어이 벚꽃 계절이다. 신선대를 가는 도로엔 벚나무들이 환호성을 지르듯 피어있다. 캄캄한 밤마저 화사하게 만드는 벚꽃의 신비로움. 요즘 잘 쓰는 ‘환장’이라는 말을 써서 말하면, 어감은 별로지만 ‘환장꽃’이 아닐까 싶다. 벚꽃 길을 지나 신선대에 이른다. 신선대는 전면을 바다에 두고, 날카로운 바위들과 켜켜이 층을 이룬, 팥 시루떡 같은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선선대 바위에서 바다를 보면 항상 느끼는 게 있다. 웅장함과 두려움과 기쁨과 놀람. 신선대에 오르면 지구의 탄생을 몇 억 몇 천만 년이라고, 숫자로 환산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

나의 이야기 2023.04.01

거제는 나를 품고, 나는 거제를 품고

내일이면 거제로 온 지 딱 2년이 됩니다. 모레부턴 거제 생활 3년차로 접어듭니다. 그 무엇도 정한 것 없이, 지인 한 사람 없이, 오히려 그러한 까닭에 거제로 왔습니다. 나이는 꽉 찼지만 용기는 무모하다 싶을 만큼 있습니다. 어쩌면 거제 생활이 노마드적 인생을 추구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집 뒤론 산이 있고 앞엔 바다가 있는 집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언덕에 있지만 한눈에 반한 집이 있어 입주했습니다. 조용히 사색하고 글을 쓰자는 원대한, 그것은 정말 원대한 꿈에 가까운 희망이었고 그렇게 살 줄 알았습니다. 헌데 지지고 볶는 일은 경기에 살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툭툭 벌어지고, 그 일을 감당하느라 분노와 우울이 연이어졌습니다. 물론 매일 매시간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글도 좀..

나의 이야기 2023.03.24

금포마을 빈터에는

산책. 이 말이 참 좋다. 고요하고 진지하나 자신을 놔버릴 수 있어서인 모양이다. 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좋다. 경등산화를 조인 후 집을 나선다. 오늘의 산책 코스는 금포마을. 금포마을에는 바다가 있고 산등성 어디쯤엔 빈터가 있다. 빈터에는 오래 된 나무와도 같은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 사등성에서 출발해 마을로 들어선다. 사등성을 품고 있는 마을은 망치산 자락에 위치한 대리마을로, 자금자금한 시골집과 꽤 정성들여 지은 전원주택이 군데군데 있다. 마을 입구엔 반듯하게 구획 정리된 논과 밭이 있고, 꽃모종을 기르는 비닐하우스와 묘목을 심은 곳이 더러 자리하고 있다. 2월 하순. 햇볕은 따스하나 바람은 차다. 등산복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잘 닦인 시멘트 길을 걷는다. 길 양 옆 논엔 올해 농사를 준..

나의 이야기 2023.03.01